지장경 읽기
- 지장경-제1. 도리천에서 신통을 보이다. [忉利天宮神通品]
- 지장경-제2. 분신들을 모으다 [分身集會品]
- 지장경-제3. 중생들의 업을 인연을 관찰하다 [觀衆生業緣品]
- 지장경-제4. 염부제 중생들의 업으로 느낌 [閻浮濟衆生業感品]
- 지장경-제5. 지옥들의 이름 [地獄名號品]
- 지장경-제6. 여래가 찬탄하시다 [如來讚歎品]
- 지장경-제7.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이익함 [利益存亡品]
- 지장경-제8. 염라왕들이 찬탄하다 [閻羅王衆讚歎品]
- 지장경-제9.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 [稱佛名號品]
- 지장경-제10. 보시한 공덕을 헤아리다 [校量布施功德緣品]
- 지장경-제11. 땅의 신들이 법을 보호하다 [地神護法品]
- 지장경-제12. 보고 듣는 이익 [繭門利益品]
- 지장경-제13. 사람들에게 부촉하다 [囑累人天品]
중생들이 업을 짓고 그에 대한 과보를 받다
염부중생업감품은 사바세계에서 중생들이 업을 짓고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염부제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인도의 세계관을 나타낸 것으로 수미산 남쪽에 있는 땅입니다. 본래는 염부나무가 번성한 인도를 뜻했는데 뒤에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상의 사바세계를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바세계는 참고 살아야 할 곳이라는 뜻인데 중생은 번뇌를 참아야 하고, 성현들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피곤함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장보살은 부처님께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육도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지장보살의 중생제도에 대한 다짐을 듣고 든든해 합니다. 이 때 정자재왕보살이 부처님께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칭찬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담을 설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전에 두 왕이 있었는데 한 왕은 부처가 되어서 중생제도를 발원했고, 다른 왕은 중생을 다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속히 성불하고자 했던 왕은 일체지성취 여래가 되었고, 중생제도를 서원한 왕은 지장보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담에서 한 왕은 부처가 된 후에 중생제도를 발원했고, 다른 한 왕은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 성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본생담에서는 먼저 부처가 되겠다고 원을 세운 이가 이미 오래전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은 곧 지장보살은 원하기만 하면 이미 부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중생을 제도한 후에 부처가 되겠다고 원력을 세웠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보살로 변장한 부처와 같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 이야기 - 다겁생래
계속해서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담을 설합니다. 오랜 세월 전에 청정연화목 여래 때에 광목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광목은 살생하기를 좋아하다가 지옥의 윤회고를 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구합니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당시의 부처님에게 아끼던 모든 것을 받치고 예배했습니다. 딸 덕분에 광목의 어머니는 일단 지옥을 벗어나서 천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여기서 광목은 죄보를 받는 무리들을 다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겠다는 원을 세워서 마침내 어머니를 천도하고 나중에 지장보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광목의 어머니는 업을 따라 지옥에도 태어나고 천민으로도 태어나서 오래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광목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우리 중생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미워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도 알지 못합니다. 지장경은 세상의 누구든지 간에 다겁생래(多劫生來)에 자신의 어머니일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계속해서 정자재왕보살은 지장보살이 오래 전부터 중생제도의 큰 원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도 제도하는 일이 끝나지 않고, 속해서 새로운 원을 세워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세월 동안 업의 원인이 계속 이어져서 끊이지 않는 것을 지장보살이 보기 때문에 거듭거듭 원을 세우게 된다고 설하십니다. 지장보살은 사바세계에서 많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데 갖가지 죄업을 짓는 이들에게 그들이 받게 될 과보를 자세히 말해주는 방편으로도 제도한다고 합니다.
지장경은 중생들의 업 인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지장보살도 부처가 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생 구제의 새로운 원을 계속해서 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업을 짓는 중생의 미혹의 업이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에게는 성선(性禪)이나 성지혜(性知慧)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악(性惡)과 성무명(性無名)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爾時에 地藏菩薩摩訶薩이 白佛言하되 世尊하 我承佛如來威神力故로 遍百千萬億世界토록 分是身形하여 救拔一切業報衆生하니 若非如來大慈力故면 卽不能作如是變化이다 我今에 又蒙佛付囑하시와 至阿逸多成佛已來히 六道衆生을 遣令解脫케하리니 唯願世尊은 願不有慮하소서 爾時에 佛告地藏菩薩하시되 一切衆生의 未解脫者는 性識無定하여 惡習結業하고 善習結果하여 爲善爲惡에 逐境而生하여 輪轉五道하되 暫無休息하며 動經塵劫하여 迷惑障難하나니 如魚遊網에 將是長流라가 脫入暫出하여도 又復遭網하니 以是等輩를 吾當憂念이러니 汝旣畢是往願하고 累劫重誓하여 廣度罪輩하나니 吾復何慮리요
해석
그 때에 지장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불여래의 위신의 힘을 이었으므로 두루 백천만억 세계에 이 신형을 나누어서 중생의 일체 업보를 뽑고 구원할 수 있으나 만약 여래의 큰 자비의 힘이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은 변화는 지을 수가 없었는데 제가 지금 또 부처님의 부촉을 입었아오니 아일다께서 성불하여 오실 때까지 육도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할 것이니 다만 원하옵건데 세존께옵서는 심려하지 마시옵소서.」하였다.
그 때에 부처님이 지장보살에게 이르시기를 「일체 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성식이 정해짐이 없어서 악함을 행하면 업을 짓고 선함을 행하면 과를 맺어 그 경지를 따라서 태어나며, 오도를 돌고 돌아 잠깐도 쉬는 일이 없고 진겁을 지내도록 움직이게 된다. 의혹에 사로잡히고 어려움에 가로막히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그물 속에 노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긴 흐름을 잠시 벗어나는가 하면 또 들어가서 다시 그물에 걸리게 된다. 이와같은 무리들을 내 마땅히 근심하였는데 너는 이미 지난날 원을 마치고 누겁 동안 거듭 맹세하여 널리 죄지은 무리들을 제도했는데 내 다시 무엇을 근심할까」라고 하시었다.
풀이
이 대목은 지장보살이 부처님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지장경은 우리 인간 삶의 아주 어둡고 부정적인 면들을 극복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지옥에 대한 소개라든가 중생들의 죄업에 의해서 받는 과보에 대한 이야기는 섬짓할 정도로 부정적인 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와 같기 때문에 지장경에서 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장경은 그런 부정적인 면들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인 면을 밝고 환한 긍정적인 모습으로 승화되도록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지장보살이 부처님께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오실 때까지 육도중생을 해탈하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미륵보살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의 제도를 책임지겠다고 부처님께 서원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죄가 많고 업장이 두껍지만 이런 중생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해서 반드시 해탈시키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가 물들어 나라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서도 강인한 어떤 원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잘못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지장보살은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과 기대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에게 일체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중생의 근성과 심식(心識)이 정해짐이 없어서 악함을 행하며 업을 짓고, 선함을 행하면 좋은 결과를 맺어 그 경계를 따라 나타나며 오도를 돌고 돌아 잠깐도 쉬는 일이 없고 많은 세월이 지나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도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의 다섯 갈래로 태어남을 뜻하며, 오취(五趣)와 같은 말입니다.
동양학에서는 어떤 사람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본래의 성품이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래의 성품이 악한 사람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에는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백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성식이 정해진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백지는 처음에는 아무런 색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백지는 칠하는 대로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붉은 색을 칠하면 붉게 되고, 검은 색을 칠하면 검게 됩니다.
이렇게 백지처럼 되어 있는게 우리들 마음의 본성입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닙니다. 그러나 행하는 대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업을 쌓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선할 수가 있고 어떤 사람도 악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보면 평소에도 아주 착하고 진실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악을 짓게 됩니다. 반대로 아주 악한 사람이라고 낙인 찍혀 있는 경우에도 아주 선량한 일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악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취급할 수도 없고 선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울 수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짓는대로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식이 정해짐이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성선설이라 든가 성악설이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불교의 입장은 텅비어 공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성이 본래 공하기 때문에 빈그릇에는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고 백지에는 무엇이든지 색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의혹에 사로잡히고 어려움에 가로막히는 것은 물고기가 그물 속에 노는 거와 같다고 했습니다. 물고기가 그물 속에 논다는 것은 결국 그물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에게 오랜 세월 동안 거듭 맹세하여 널리 죄 지은 중생들을 제도했기 때문에 근심할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까지 부처님의 걱정에 대해서 지장보살이 중생제도를 책임지겠다고 하고 다짐하고 부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생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 이야기 - 서원
본문
說是語時에 會中에 有一菩薩摩訶薩하되 名定自在王이라 白佛言하되 世尊하 地藏菩薩이 累劫以來에 各發何願하야 今蒙世尊의 慇懃讚歎이니까 唯願世尊은 略而說之하소서 爾時世尊이 告定自在王菩薩하시되 諦聽諦聽하여 善思念之하라 吾當爲汝하여 分別解說하리라 乃往過去無量阿僧祗那由他不可說劫에 爾時有佛하시니 號一切智成就如來應供正遍智明行足善逝世間解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이라 其佛壽命은 六萬劫이니 未出家時에 爲小國王하여 與一隣國王으로 爲友하야 同行十善하여 饒益衆生하더니 其隣國內에 所有人民이 多造衆惡커늘 二王議計하고 廣說方便할새 一王은 發願하여 早成佛道하여 廣度是輩하여 令使無餘케하리라하니라
해석
이 말씀을 설하실 때에 회가운데 한 보살마하살이 있어 이름을 정자재왕이라고 하였는데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지장보살이 누겁 동안 각각 어떠한 원을 발하였기에 지금 세존의 은근하신 찬탄을 받으십니까. 오직 바라옵건데 세존께옵서는 간략하게 설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정자재왕보살에게 고하시기를 「잘 듣고 잘 들어서 착한 생각으로 생각해 보아라. 내 마땅히 너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지나간 과거의 무량 아승지 나유타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겁인 그 때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호를 일체지성취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고 했다. 그 부처님의 수명이 육만겁이나 되었는데 출가하지 아니했을 때 작은 나라에 임금이 되어서는 이웃 나라의 임금과 벗이 되어 함께 열 가지 착한 일을 행하여 중생을 넉넉하고 유익되게 하였다. 그 이웃 나라안에 사는 인민이 여러 가지 악한 일을 많이 지으니 두 임금이 계책을 의론하고 널리 방편을 베풀었는 데 한 임금은 원을 발하기를 일찍이 불도를 성취하여 마땅히 이 무리들을 제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고 했으며」
풀이
여기서도 지장보살과 부처님과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큰 원력을 세워 중생들을 제도하겠다고 말하는 지장보살이 있어서 근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법회 가운데서 정자재왕보살은 지장보살이 어떻게 하여 그렇게 큰 원을 세우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정자재왕보살은 같은 보살의 입장에서 지장보살이 부처님께 큰 찬탄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원력이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지장보살의 세 번째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을 들려줍니다. 부처님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세월 전에 한 부처님이 계셨다고 말씀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본문에서 무량아승지나유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시간의 장구함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밖에도 시간을 표현할 때 불교에서는 무한(無恨), 무수(無壽), 무량(無量), 불가설(不可說), 불가세(不可歲)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몇 십년 몇 백년 또는 몇 천년 정도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렇게 긴 수억 만년 정도의 시간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보면 긴 시간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역사가 짧고 전생이라 하더라도 기억이 잘 안 되니 시간에 대한 관념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이처럼 긴 세월의 표현을 쓸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과장된 표현 같지만 깨달음의 수준에서 보면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머나먼 과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월이 한눈으로 짐작이 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씁니다.
예를 들어서 하루살이는 몇 시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사람은 몇 십년 또는 몇 백년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안목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으면서 이러한 표현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공간을 이야기할 때도 어떤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무한한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또 시간을 말할 때도 무량, 무한, 불가설, 불가세이라는 말로 무한한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런 무한한 시간 전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호를 일체지성취 여래, 응고,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체지성취 여래에서부터 불세존까지의 이름은 어떤 성불의 경지나 인격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부처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전생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 때 부처님의 수명이 육만 겁이나 되었는데 출가하지 않았을 때 작은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이웃 나라의 임금과 벗이 되어 함께 열까지 착한 일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웃나라 임금과 열 가지 착한 행위를 하며 중생을 이롭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안에 사는 백성이 여러 가지 악한 일을 많이 지어 두 임금이 대책을 의논하고 널리 방편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한 임금은 빨리 불도를 성취하여 이 중생들을 제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다른 임금은 중생을 제도하여 죄의 과보를 모두 없게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락하게 하지 못하면 끝내 자기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흔히 불자들은 성불이 불교의 궁극목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장경의 사상을 살펴보면 중생제도가 성불의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불의 목적은 바로 중생제도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은밀히 따지면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 아니고 성불은 방편에 불과합니다. 중생제도가 불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목적은 중생제도에 있는 것이지 성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궁극목적이 중생제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불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불을 하면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불해서 힘을 키운 뒤에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불은 중생을 제도하는데 아주 좋은 방편이 되고 좋은 힘이 됩니다.
성불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 것을 외로운 해탈이라고 해서 고조(孤調)라고 합니다. 나한이나 아라한 같은 사람들은 해탈은 했지만 남을 위하는 마음이 없고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고조해탈이라고 합니다. 고조해탈은 예를 들면 금은보화로 만들어 놓은 아주 화려한 집에 혼자 가만히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물질은 다 갖추어져 있는데 혼자서 아무일도 없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다리 밑에서 자더라도 누가와 같이 있으면 그것이 더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설사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세상이 더 나은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풍요롭고 화려하다 해도 자기 혼자만 사유하게 되면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비록 자기를 핍박하고 욕을 하고 꾸짖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는 세상이 더 나은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가지 경우에서 지장보살은 두 번째 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지장보살의 원력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다
본문
一王發願하되 若不先度罪苦하여 令是安樂하여 得至菩提하면 我終未願成佛이라하니라 佛告定自在王菩薩하시되 一王發願하여 早成佛者는 卽一切智成就如來是요 一王發願하되 永度罪苦衆生하고 未願成佛者는 卽地藏菩薩是니라
해석
「한 임금은 원을 발하기를 만약 먼저 죄고를 제도하여 이들로 하여금 안락하지 못하게 할 것이면 나는 끝내 성불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했다」고 하시었다. 부처님께서 정자재왕보살에게 고하시기를 한 임금이 원을 발하여 일찍이 성불한 이는 곧 일체지성취여래가 이 분이요, 한 임금이 원을 발하여 영원토록 죄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기를 원하지 않은 이는 곧 지장보살이 이분이다.
풀이
이 대목에서도 지장보살의 원력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 정자재왕보살에게 말하기를 일체지성취여래가 원을 발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바로 지장보살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도 지장보살의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사상은 곧 모든 보살사상의 으뜸이 됩니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만 충분하다면 성불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생을 위하는 보살정신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법회를 볼 때 편안하게 앉아서 조용히 법문을 듣고 예불을 할 수 있는 것은 뒤에서 법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지장보살의 보살정신을 실천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공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베려해 주고 그 뒷바라지를 해 주는 보살들이야말로 몸을 아끼지 않고 불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정신, 특히 지장보살 정신에 근거한다면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불법을 제대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어떤 분야에서든 존재합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그런 보살정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네번째 전생 이야기 - 인연
본문
復於過去無量阿僧祗劫에 有佛出世하시니 名淸淨蓮華目如來라 其佛壽命四十劫이라 像法之中에 有一羅漢하여 福度衆生할새 因次敎化라가 遇一女人하니 字曰光目이라 設食供養커늘 羅漢問之하되 欲願何等인고 光目答言하되 我以母亡之日에 資福救拔하되 未知我母生處何趣니다 羅漢愍之하사 爲入定觀하여 見光目女母하니 墮在惡趣하여 受極大苦어늘 羅漢問光目言하되 汝母在生에 作何行業이건대 今在惡趣受極大苦오 光目答曰我母所習은 唯好食啗魚鱉之屬하며 所食魚鱉에 多食其子하되 或炒或煮하여 恣情食啗하니 計其命數하면 千萬復倍니다
해석
다시 과거 무량 아승지겁에 출세하신 부처님이 계시니 이름을 청정연화목여래라고 하셨는데 그 부처님의 수명은 사십겁이었다. 상법 가운데 한 나한이 있어 복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인하여 차례로 교화하다가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름을 광목이라고 했다. 음식을 베풀어 공양하니 나한이 묻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광목이 대답하기를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복을 지어 구원하여 빼어 내고자 하나 저의 어머니가 어느 곳에 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니 나한이 불쌍히 여겨 그를 위하여 정에 들어가 관하니 광목의 어미가 악취에 떨어져서 지극히 큰 고초를 받고 있음이 보였다.
나한이 광목에게 묻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어떠한 행업을 지었기에 지금 악취에서 지극히 큰 고초를 받고 있느냐.」
광목이 대답하기를 「저의 어머니가 한 일은 오직 물고기와 자라 등을 먹기를 좋아하여 먹은 물고기와 자라 중에도 그 새끼를 많이 먹었는 데 혹 굽기도 하고 혹 지지기도 하여 마음껏 많이 먹었으니 그 목숨의 수를 계산한다면 천만에도 다시 배가 될 것입니다.」
풀이
여기서는 지장보살의 네번째 전생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본문에서 정자재왕보살이 부처님께 또 묻습니다. 네번째 지장보살의 전생이야기에는 청정연화목여래라는 이름의 부처님이 등장 합니다. 청정연화목여래 시절에 한 나한이 있었는데 중생을 교화하다가 광목이라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광목이 나한에게 음식을 베풀어 공양을 올렸는데 나한이 광목에게 공양 올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광목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복을 지어 어머니를 구원하고자 하는데 어머니가 어느 곳에 태어나셨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지장보살의 두 번째 전생 이야기에 나오는 바라문의 딸이 말한 내용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몇 생을 돌면서 수천 수만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수많은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과거생에 우리가 살아온 역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부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아닌 경우가 없고, 부모 관계아닌 사람이 없고, 형제 자매 관계를 맺은 사람이 아닌 경우가 없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내려오면서 우리가 전부 그런 저런 인연을 맺으며 이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경전에서 보더라도 지장보살은 바라문의 아들이 되었다가 딸이 되기도 하고 또다른 사람의 딸이 되어 광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에서 광목의 말을 듣고 나한은 삼매에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광목의 어머니가 악취에 떨어져서 지극히 큰 고초를 받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광목에게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어떠한 행업을 지었기에 악취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지 묻습니다. 광목은 자신의 어머니가 물고기와 자라 등의 새끼를 마음껏 먹었으며 죽인 목숨의 수를 계산하면 천만의 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한은 어머니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성으로 청정연화목여래를 염송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여래의 형상을 조성하거나 탱화를 그리면 좋은 과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우리가 불상을 조성하고 탱화를 그리면 큰 공덕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법당 불사보다 불상 조성의 불사가 훨씬 쉽게 잘 이루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네번째 전생 이야기 - 부처님의 광명
본문
尊者慈愍하시어 如何哀救하소서 羅漢愍之하여 爲作方便하사 勸光目言하되 汝可志誠으로 念淸淨蓮華目如來하고 兼塑畵形像하면 存亡獲報하리라 光目聞已하고 卽捨所愛하여 尋畵佛像하여 而供養之하고 復恭敬心으로 悲泣瞻禮하더니 忽於夜後에 夢見佛身하니 金色晃耀하여 如須彌山하며 放大光明하고 而告光目하되 汝母不久에 當生汝家하여 纔覺飢寒이면 卽當言說하리라하니라
해석
「존자님께서는 자비심으로 불쌍히 여겨 어찌 하시던지 가련하게 생각하여 구원해 주십시요.」
나한이 불쌍히 여겨 방편을 지어서 광목에게 권하기를 「네가 지성으로 청정연화목여래를 염하고 겸하여 형상을 조성하거나 탱화를 그러든지 하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과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광목이 듣기를 마치고는 곧 애끼던 물건을 팔아 불상을 그려 모시고 공양을 올리며 다시 공경하는 마음으로 슬피울면서 첨례 하였더니 문득 새벽 꿈에 부처님을 뵈오니 금빛이 밝게 빛나서 수미산과 같으며 큰 광명을 방하여 광목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어머니가 오래지 아니하여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나 겨우 배고프고 추운 줄을 깨닫게 되면 곧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풀이
지장보살의 네번째 전생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광목은 나한의 말을 듣고 공양을 올리며 다시 공경하는 마음으로 슬피 울면서 여래를 우러러보았더니 꿈에 부처님께서 큰 광명을 놓아 어머니가 오래지 않아서 광목의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광목에게 일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현몽 또는 가피라고 합니다. 가피에는 현훈가피(顯薰加被)와 명훈가피(冥薰加被)가 있습니다. 광목의 경우처럼 꿈에 현몽으로 나타나는 것을 현훈가피라고 합니다. 반대로 명훈가피는 밖으로 환히 드러나는 게 아니고 가만히 소리 없이 입게 되는 가피력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가피를 입게 되는데 이런 경우를 명훈 가피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훈가피보다 명훈가피를 입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힘을 얻게 되는 경우가 바로 명훈가피인 것입니다. 명훈가피는 자기도 모르게 불교의 이치를 깨닫고 참회하며 자신의 생각이 달라져 생활태도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또 자기의 삶에 어떤 의지처가 생기고 자기의 삶을 조종해주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느끼는 것을 명훈가피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소가 들을 지나 가는데 회초리를 들고 직접 때리지 않아도 뒤에서 소몰이가 따라오면 함부로 아무곳이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목이가 없으면 소가 제마음대로 행동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불교라고 하는 것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자신의 삶을 조종해주고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이끌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명훈가피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불문 마지막에는 명훈가피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려서 현훈가피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현훈가피를 지나치게 기대하고 바라면 생각이 사사로워지거나 정신이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자꾸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다 보면 때때로 잘못된 형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형상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반드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광목의 어머니가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다
본문
其後家內에 婢生一子하니 未滿三日에 而乃言說하며 稽首悲泣하여 告於光目하되 生死業緣으로 果報自受라 吾是汝母니 久處暗冥하여 自別汝去로 累墮大地獄이러니 今蒙福力하여 當得受生이나 爲下賤人이요 又復短命이라 壽年十三에 更落惡道하리니 汝有何計하여 令吾脫免가 光目聞說하고 知母無疑하여 哽咽悲啼하며 而白婢子하되 旣是我母인데 合知本罪하리니 作何行業하여 墮於惡道잇가 婢子答言하되 以殺生毁罵二業受報호라 若非蒙福하여 救拔吾難이면 以是業故로 未合解脫하리라 光目問言하되 地獄罪報其事云何잇가 婢子答言하되 罪苦之事는 不忍稱說이라 百千歲中에 卒白難竟이니라
해석
그 뒤에 집 안에서 종이 한 자식을 낳으니 삼일이 되기 전에 이내 말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며 슬피 울면서 광목에게 고하기를 「생사의 업연으로 과보를 스스로 받게 되었는데 나는 너의 어미로 오래도록 어두운 곳에 있다가 너를 이별하고 가서 여러번 큰 지옥에 떨어졌으나 너의 복력을 입어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나 하천한 사람이 되었으며 또 다시 단명하여 나이 열 세 살이 되면 다시 악도에 떨어질 것이니 너에게 어떠한 계책이 있어 나로 하여금 벗어나서 면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거늘 광목이 이 말을 듣고 어머니로 알아 의심이 없었다. 목매어 슬피 울면서 종의 자식에게 이르기를 「이미 바로 나의 어머님이라면 본래 지은 죄업을 다 알 것이니 어떠한 행업을 지어서 악도에 떨어졌습니까.」하고 물으니 종의 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생물을 죽이고 불법을 헐뜯고 비방한 두 가지 업으로 보를 받았는데 만약 복을 입혀서 나를 난에서 빼내며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이 업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광목이 묻기를 「지옥의 죄보는 어떠한 것인지요.」하니 종의 아들이 대답하기를 「죄고의 일은 차마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백천세를 두고 말한다 하더라도 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
풀이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에서 광목의 어머니가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대목입니다. 광목은 부처님의 현몽을 받은 뒤 집안의 종이 한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삼일이 되기도 전에 말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슬피 울면서 광목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광목의 어머니인데 생사의 업연에 의해 스스로 과보를 받게 되어 오래도록 어두운 곳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광목을 이별하고 나서 여러 번 큰 지옥에 떨어졌으나 광목의 법력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단명하여 열세살이 되면 다시 악귀에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광목에게 자신의 과보를 면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광목이 어머니의 말을 알아듣고 목메어 슬피 울면서 어머니에게 어떤 죄업을 지었기에 악귀에 떨어졌느냐고 묻습니다. 종의 자식이 된 어머니는 자신의 죄업을 낱낱이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고 불법을 헐뜯고 비방한 두 가지 죄업을 지어 과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만약 복된 힘으로 나를 고난에서 구출하지 않으면 이 업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법보시를 하거나 재보시를 해서 많은 복을 지으면 돌아가신 선망부모의 영가가 천도 되는 일은 거짓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한 사람이 정법을 믿고 그 정법대로 잘 행하면 과거에 인연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복력을 입고 모두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크게 출세하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출세하고 한사람이 잘못되면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광목이라는 여자가 어머니를 위해서 복을 지어서 그 어머니가 과보를 벗어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광목은 지옥의 죄보가 어떤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랬더니 종의 아들이 죄의 고통은 차마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보니 고통스러움은 백천세를 두고 말한다 하더라도 다 말할 수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광목의 어머니의 천민환생을 통해 우리는 인과의 중요함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광목과 어머니가 만나서 이야기하다
본문
光目聞已에 啼淚號泣하여 而白空界하되 願我之母永脫地獄하여 畢十三歲하고는 更無重罪와 及歷惡道케하시며 十方諸佛이 慈哀愍我하사 聽我爲母하여 所發廣大誓願하소서 若得我母永離三途와 及斯下賤과 乃至女人之身하여 永劫不受者면 願我自今日後로 對淸淨蓮華目如來像前하여 却後百千萬億劫中에 應有世界의 所有地獄과 及三惡道諸罪苦衆生을 誓願救拔하여 令離地獄惡趣畜生餓鬼等하고 如是罪報等人이 盡成佛竟然後에 我方成正覺하리다하더니 發誓願已에 具聞淸淨蓮華目如來之說이라 而告之曰光目아 汝大慈愍으로 善能爲母하여 發如是大願일새 吾觀汝母十三歲畢하면 捨此報已하고 生爲梵志하여 壽年百歲하고 過是報後에는 當生無憂國土하여 壽命不可計劫이라 後成佛果하여 廣度人天하되 數如恒河沙하리라하니라
해석
광목이 듣기를 마치고는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공계를 향하여 아뢰기를 「원하옵건데 나의 어머니가 영원히 지옥을 벗어나서 십삼세를 지내고도 다시는 무거운 죄로 악도에 돌아 다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시방에 계시는 여러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가 어머니를 위해 발하는 광대서원을 들어 주소서. 만약 저의 어머니가 영원히 삼도와 이러한 하천과 여인의 몸까지를 영원히 여의고 영겁 동안 받지 않게 된다면 저는 오늘부터 이 뒤로는 청정연화목여래의 상 앞에 나아가 이 뒤 백천만억겁 중이라도 세계마다 있는 지옥과 삼악도에서 모든 죄고에 시달리는 중생들은 빼어내어 구원하여 영원히 지옥, 악취, 축생, 아귀 등을 여의도록 서원하고 이와 같은 죄보를 받는 사람들이 모두 성불한 뒤에 나는 바야흐로 정각을 성취할 것을 원하옵니다.」 하면서 서원을 발하여 마치니 청정연화목여래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이르시기를 「광목아 너의 큰 사랑과 연민으로 잘도 어머니를 위하여 이 같은 큰 소원을 내는 구나. 내가 관하건데 너의 어머니는 십삼세가 지나면 이 보의 몸을 버리고 범지로 태어나서 수를 백세나 살 것이며, 이 보가 지나고 나면 무국토에 나서 수명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살게 된다. 뒤에 불과를 성취하여 널리 인간과 천을 제도하며 그 수는 항하의 모래수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풀이
이 대목은 광목과 어머니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광목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향해 울부짖으며 말합니다. 어머니가 영원히 지옥을 벗어나서 십삼세를 마치면 다시는 무거운 죄와 악도에 돌아다니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광목은 모든 중생이 지옥과 삼악도에서 죄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중생들을 빼내어 구원하며 그 중생들이 모두 성불한 뒤에야 정각을 성취할 것이라고 발원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지장보살의 원력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중생이 성불한 뒤에 정각을 이루겠다는 서원인 것입니다. 여기서 광목은 바로 지장보살의 전신입니다. 지장보살은 어려움에 처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먼저 제도하고 나서 자신이 성불하겠다는 대원력을 세우는데 이 대목에서도 지장보살의 원력이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나서 깨달음을 이루며, 지옥이 텅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으며,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하는 지장보살의 세 가지 정신을 여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도 지옥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는 내용의 발원은 정말 용기 있고 힘찬 각오가 담겨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가 있지만 실제로는 지장보살에게 지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큰 각오와 용기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광목이 이와 같은 서원을 발할 때 청정연화목여래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습니다. 광목의 큰 사랑과 연민으로 어머니는 십삼세가 지나면 죄의 과보를 버리고 종교를 믿는 어떤 나라에 태어나 백세를 누릴 것이며 또 그 과보가 지나면 무우국토(無憂國土)라고 하는 국토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바라문, 금지로 태어나서 백세를 살게 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우국토(無憂國土)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 동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불하여 널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인간과 하늘을 제도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부처님이 광목이라고 하는 여자에게 똑똑한 말로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또다시 현훈가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네 번째 전생담 이야기 - 인과
본문
佛告定自在王하시되 爾時羅漢이 福度光目者는 卽無盡意菩薩是요 光目母者는 卽解脫菩薩是요 光目女者는 卽地藏菩薩是라 過去久遠劫中에 如是慈愍하여 發恒河沙願하야 廣度衆生하니라 未來世中에 若有男子女人의 不行善者와 行惡者와 乃至不信因果者와 邪婬妄語者와 兩舌惡口者와 毁謗大乘者인 如是諸業衆生은 必墮惡趣하리니 若遇善知識하여 勸令一彈指間이라도 歸依地藏菩薩케하면 是諸衆生이 卽得解脫三惡道報하리라
해석
부처님께서 정자재왕보살에게 고하시기를 「그 때의 나한으로 복을 가지고 광목을 제도한 사람은 곧 무진의 보살이요, 광목의 어머니느 곧 해탈보살이요, 광목의 어머니는 곧 해탈보살이요, 광목녀는 곧 지장보살이다. 과거 구원겁 중에 이와 같이 자비와 연민으로 항하사의 원을 발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다. 미래세 중에 만약 남자와 여인이 있어 선을 행하지 않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와 인과를 믿지 않는 자와 사음하고 망어하는 자와 두 개의 혀로 욕하는 자와 대승을 훼방하는 자 등 이와 같은 여러 업을 짓는 중생들은 반드시 악취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 선지식을 만나 권을 받아 손가락을 한번 퉁길 사이라도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이 여러 중생은 곧 삼악도의 과보에서 해탈을 얻게 될 것이며,」
풀이
계속해서 지장보살의 네 번째 전생담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자재왕보살에게 그 때의 나한의 몸으로 복을 지어 광목을 제도한 사람은 무진의 보살이고, 광목의 어머니는 해탈보살이고, 광목은 바로 지장보살이라고 말합니다. 무진의 보살은 법화경에 나오는 보살입니다. 광목의 어머니는 광목의 간절한 기도덕분에 해탈보살이 된 것입니다.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나한과 광목과 광목의 어머니는 각각 무진의 보살, 해탈보살, 지장보살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 오랜세월전에 이와 같이 자비와 연민으로 헤아릴 수 없는 원을 발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잘못된 악업을 짓는 중생들은 반드시 악취에 떨어진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선을 행하지 않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와 인과를 믿지 않는 자는 악도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과는 매우 중요한 불교용어이므로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의 연결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으로 좇아서 생기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도 인연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인 것이므로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의 인과관계를 깨달으면 불교공부를 웬만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지, 한 가정이든지, 한 사회든지, 한 단체든지 그럴 만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한 결과가 나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자연 현상은 인과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인간 관계에서는 인과의 법칙을 망각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집이나 집착,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순리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해하듯이 인간 관계도 그렇게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인과의 원리를 알면 뼈아프게 가슴칠 일도 없고, 가슴에 못 박을 일도 없으며,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할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연의 현상처럼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이럴 테면 체념하기가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해서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는 자연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도 자연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전부 그렇게 인연의 도리로 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선정에 들어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인연의 도리는 초․중․고등 학교 교과서로 채택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과가 두려워서 악을 짓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나쁜 짓을 하지 않아야 되며, 좋은 일을 하면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교육을 시킨다면 인성교육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가르침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인과를 잘 가르쳐 주면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인과의 이치만 전부 믿는다 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인과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을 만큼 인과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면 거기에 따르는 보상은 어떤 형태로든 자연적 있게 마련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가을에 결코 추수할 수 없습니다. 또 씨를 뿌려 났다 하더라도 거름도 주고 김도 메고 물도 대주어야 좋은 열매를 맺고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씨앗을 뿌려놓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잘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과의 원리는 초등학생들도 다 알 수 있는 이치이지만 이처럼 어른들도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인과입니다. 우리는 인과의 이치를 잘 생각해서 스스로 납득이 되도록 인식시켜야 합니다. 인과는 누가 말해서 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납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과의 법칙이 몸에 베여 자기의 것이 되어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사음하고 망어 하는 자와 욕하는 자와 대승을 훼방하는 차 등은 반드시 악취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된 나쁜 짓을 하면 악취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지식을 만나 그의 권유로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중생은 삼악도의 과보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장보살에게 귀의한다는 것이란?
여기서 지장보살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지장보살의 원력을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정말 위대한 원력을 갖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건지겠다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개인적 소망을 꿈으로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손가락을 한 번 퉁기는 사이라도 중생이 삼악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죄업은 결국 지장보살의 좋은 원력에 귀이하고 그 원력의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낸다면 큰 허물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에게 귀의한다는 말은 지장보살과 같은 큰 꿈, 좋은 꿈을 가슴에 한번 가져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받는 중생의 고통을 들어주는 그런 마음을 가슴에 가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소망은 늘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여기서 손가락을 한 번 퉁기는 사이에 걸리는 시간은 1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앞에서 열거한 수많은 죄업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허무맹랑한 말처럼 들리지만 결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꾸고 있는 개인적인 소망과 지장보살의 원대한 꿈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소한 개인의 의․식․주 문제와 승진문제, 사업문제 같은 것을 평생 꿈꾸며 기대를 하고 온통 그 꿈으로 가득차있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장보살과 같은 원력을 한 순간이라도 마음에 품어볼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적 꿈과 지장보살의 원력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지장보살에게 귀의하면 죄업을 소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업이 크다고 해도 지장보살의 원력을 가슴에 품으면 한 순간 죄업이 소멸된다는 이야기 속에서 원력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중생들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경우가 드뭅니다. 우리가 알고도 죄를 짓지만 모르고도 죄를 짓는 수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업만을 강조해서는 결코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바람직한 불교는 업장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력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업장만 갖고 이야기하면 그냥 자기가 지은 업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업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업장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원력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업은 일종의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의 재산은 천원뿐인 사람이 천만원의 빚을 졌다고 하면 갚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십억을 마음대로 빌리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천만원이라는 돈은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그건 바로 강한 원력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업이 아닌 원력에 의해 살아가다
강한 원력의 삶이 있는 사람은 설사 죄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죄업으로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힘차게 사는 원력이 큰 사람들은 설사 죄업이 좀 있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장보살에게 한 순간 귀의하면 삼악도의 과보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원리를 잘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바람직한 불교는 원력에 의한 삶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업에 의해서 살아 간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력에 의해서 살아 간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 불교입니다.
원력이 강하면 자연적으로 인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면하지 못하는 정업(定業)을 지장보살은 원력의 힘으로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원력의 힘이 위대함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력은 바로 생명입니다. 그것은 곧 꿈이요, 기대감입니다. 지장보살과 같은 그런 꿈을 절실하게 자기의 가슴에 와닿게 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지장보살과 같은 그런 중생을 위하는 큰 꿈을 가슴에 품는다면 그 순간이 바로 성불입니다. 우리는 그저 소소한 개인적인 문제, 가족적인 문제, 가정문제, 사업문제 등에 관한 그런 조그마한 울타리 속에서 꿈과 희망을 갖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여 지장보살의 큰 꿈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지장보살과 같은 큰 원력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원력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에게 이 경전을 기록하여 널리 유포하라고 하다
본문
若能至心歸敬하며 及瞻禮讚歎하고 香花衣服과 種種珍寶와 或復飮食으로 如是奉事者는 未來百千萬億劫中에 常在諸天하여 受勝妙樂하리니 若天福盡하여 下生人間이라도 猶百千劫을 常爲帝王하여 能憶宿命因果本末하리라 定自在王아 如是地藏菩薩이 有如此不可思議大威神力하여 廣利衆生하나니 汝等諸菩薩은 當記是經하여 廣宣流布하라 定自在王이 白佛言하시되 世尊하 願不有慮하소서 我等千萬億菩薩摩訶薩이 畢能承佛威神하사 廣演是經하여 於閻浮提에 利益衆生하리다 定自在王菩薩이 白世尊已하고 合掌恭敬하며 作禮而退하니라
爾時四方天王이 俱從座起하여 合掌恭敬하고 白佛言하시되 世尊하 地藏菩薩이 於久遠劫來에 發如是大願하되 云何至今에 猶度未絶하여 更發廣大誓願하나이까 唯願世尊하 爲我等說하소서 佛告四天王하시되 善哉善哉라 吾今에 爲汝及未來現在天人衆等하여 廣利益故로 說地藏菩薩이 於娑婆世界閻浮提內生死道中에 慈哀救拔하여 度脫一切罪苦衆生하는 方便之事하리라 四天王言하되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나이다 佛告四天王하시되 地藏菩薩이 久遠劫來로 迄至于今히 度脫衆生하되 猶未畢願하여 慈愍此世罪苦衆生하며 多觀未來無量劫中에 因蔓不斷일새 以是之故로 又發重願하나니 如是菩薩은 於娑婆世界閻浮提中에 百千萬億方便으로 而爲敎化하나니라
해석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여 공경하고 첨례하며 찬탄하고 향과 꽃과 의복과 갖가지의 진보와 혹은 다시 음식을 가지고 이와 같이 받들어 모시는 자는 미래세의 백천만억겁 중에도 항상 모든 하늘에 있으면서 뛰어나게 묘함과 즐거움을 받을 것이다. 만약 하늘의 복이 다하고 인간에 하생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백천만겁을 항상 제왕이 되며 능히 숙명의 인과에 대한 본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정자재왕아, 지장보살은 이와 같은 사의하지 못하는 대위신력이 있어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니 너희들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 경전을 기록하여 널리 유포케 하라고 하시었다.」
정자재왕보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데 심려치 마시옵소서. 저희들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반드시 부처님의 위신을 이어 널리 이 경을 연설하여 염부제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겠습니다.」 라고 정자재왕보살이 세존께 아뢰기를 마치고 합장 공경하여 예를 올린 후에 물러갔다. 그 때에 사방천왕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하여 공경을 표시하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지장보살이 구원겁으로부터 이와 같은 대원을 발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오히려 제도함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광대한 서원을 발하십니까? 오직 원하옵건데 세존께옵서는 저희들을 위하여 설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사천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착하구나. 내 지금 너희들과 미래와 현재의 천인의 무리들을 위해 이익을 널리 하고자 하므로 지장보살이 사바세계 염부제 안의 생사도중에서 사랑과 슬픔으로 일체의 죄고중생을 구원하여 도탈케하는 방편의 일을 설하여 주겠다.」고 하시니 사천왕이 말하기를 「예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데 즐거히 듣고자 합니다.」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천왕에게 이르시기를 「지장보살은 구원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중생을 도탈하였으나 아직도 원을 마치지 못하여 이 세계의 죄고에 시달리는 중생을 사랑과 연민으로 생각하여 미래에 끝없는 무량겁중에도 이어져서 끊어지지 아니함을 관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다시 거듭 원을 내었으니 이와 같이 보살은 사바 세계 염부제 중에서 백천만억의 방편으로 교화하고 있다.」
풀이
계속해서 지장보살의 원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여 공경하며 우러러 찬탄하고 온갖 공양물을 바치면 항상 모든 하늘에 있으면서 뛰어난 즐거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늘의 복이 다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항상 제왕이 되어 능히 숙명의 인과에 대한 본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숙명의 인과에 대한 본말을 기억한다는 말은 과거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살다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다음 생에 대한 것을 전부 다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몇 생을 거치면서 오랜 전생의 이야기를 다 기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에게 이 경전을 기록하여 널리 유포하라고 하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정자재왕보살에게 지장보살은 이와 같은 생각하지 못하는 대위신력이 있어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니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 경전을 기록하여 널리 유포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자재왕보살은 부처님께 수많은 보살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서 이 경을 널리 펴서 사바세계에 있는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정자재왕보살은 지장보살이 어떤 인연으로 지금의 지장보살과 같은 원력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의 세번째와 네번째 전생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사천왕은 부처님께 묻습니다. 지장보살이 오랜 세월로부터 서원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광대한 서원을 세워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 오랜 세월 동안 지장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하고 제도했는데 왜 또다시 서원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지장보살은 큰 원력을 세워서 그동안 중생을 제도했는데 왜 아직까지 죄많은 중생들이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에게 사바세계의 사랑과 자비로 일체의 중생을 구원하여 제도하라는 방편을 펴라고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또 사천왕에게 지장보살은 오랜 세월로부터 지금까지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아직도 서원을 마치지 못하여 죄의 고통에서 시달리는 중생을 사랑과 연민으로 생각하여 미래의 끝없는 많은 세월로 업의 인연이 이어져서 끊어지지 아니함을 보게 되어 다시 원을 내어 방편으로 교화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지장보살의 원도 끝이 없이 이어지고 중생도 업을 짓는 것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있는 동안 해서 보살이 있고 부처가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관관계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에는 중생이 남지 않고 전부 부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부처와 중생의 관계는 항상 같이 존재합니다. 사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중생과 부처의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는 이상 지장보살의 원력도 영원히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업과 관련하여 지장보살에 대한 원력 이야기를 강조했습니다.
염부제 중생의 업감
본문
四天王아 地藏菩薩이 若遇殺生者하면 說宿殃短命報하고 若遇竊盜者하면 說貧窮苦楚報하고 若遇邪淫者하면 說雀鴿鴛鴦報하고 若遇惡口者하면 說眷屬鬪諍報하고 若遇毁謗者하면 說無舌瘡口報하고 若遇瞋恚者하면 說醜陋癃殘報하고 若遇慳悋者하면 說所求違願報하고 若遇飮食無度者하면 說飢渴咽病報하고 若遇佃獵恣情者하면 說驚狂喪命報하고 若遇悖逆父母하면 說天地災殺報하고 若遇燒山林木者하면 說狂迷取死報하고 若遇前後父母惡毒者하면 說返生鞭韃現受報하고 若遇網捕生雛者하면 說骨肉分離報하고 若遇毁謗三寶者하면 說盲聾瘖啞報하고 若遇輕法慢敎者하면 說永處惡道報하고 若遇破用常住者하면 說億劫輪廻地獄報하고 若遇汚梵誣僧者하면 說永在畜生報하고 若遇湯火斬斫傷生者하면 說輪廻遞傷報하고 若遇破戒犯齋者하면 說禽獸飢餓報하고 若遇非理毁用者하면 說所求闕絶報하고 若遇我慢貢高者하면 說卑使下賤報하고 若遇兩舌鬪亂者하면 說無舌百舌報하고 若遇邪見者하면 說邊地受生報하나니 如是等閻浮提衆生의 身口意業惡習結果로 百千報應을 今粗略說하나니 如是等閻浮提衆生의 業感差別을 地藏菩薩이 百千方便으로 而敎化之언마는 是諸衆生이 先受如是等報하고 後墮地獄하여 動經劫數하되 無有出期하나니 是故汝等은 護人護國하여 無令是題衆生으로 迷惑衆生케하라 四天王聞已에 涕淚悲已하시고 合掌而退하니라
해석
「사천왕아,
지장보살이 만약 살생하는 자를 만나면 전생의 재앙으로 단명의 갚음을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도적질하는 사람을 만나면 빈궁으로 고초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사음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새와 비둘기와 원앙새가 되는 갚음을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악구하는 사람을 만나면 권속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게 되는 보를 설해주고,
만약 훼방하는 사람을 만나면 혀가 없어지거나 입에 창이 나는 보를 설해주며,
만약 성내고 분내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더럽고 파리해지는 병의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인색하고 탐하는 사람을 만나면 구하는 것이 소원대로 안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음식을 도수없이 먹는 사람을 만나면 굶주리고 목말라서 목병나는 보를 설해주고 제멋대로 전렵하는 사람을 만나면 놀래고 미쳐서 목숨을 잃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부모에게 패역하는 사람을 만나면 천지에 재앙과 죽음의 보가 내린다고 설해주고
만약 산림과 나무를 불에 태우는 사람을 만나면 미쳐서 정신없이 다니다가 죽게 되는 보를 설해주며
만약 전후 부모에게 악독한 사람을 만나면 바뀌어 나서 매맞음을 당장 받게 되는 보를 설해주고
만약 그물로 날짐승을 잡는 사람을 만나면 골육간에 헤어지고 이별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삼보를 훼방하는 사람을 만나면 장님과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에 불법을 가볍게 여기고 가르침을 업신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영원히 악도에 떨어지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상주물을 파괴하거나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면 억겁 동안 지옥을 윤회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에 범행을 더럽히고 중을 속이는 사람을 만나면 영원히 축생이 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끓는 물이나 모진 불이나 낫이나 도끼로 생물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윤회하면서 되 갚음을 받는 보가 있다고 설해주며
만약 계를 파괴하거나 재를 범하는 사람을 만나면 짐승이 되거나 기아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비리에 재물을 마구 쓰는 사람을 만나면 구하는 것이 없어지고 끊어지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아만심이 너무 높은 사람을 만나면 하천하게 부림을 받는 종의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고
만약 두 가지 말로 이간질하여 싸우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혀가 없거나 혀가 백 개나 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주며
만약 사견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변방에 태어나는 보를 받는다고 설해준다.
이와 같은 무리의 염부제 중생이 몸이나 입이나 뜻으로 짓는 업과 악습의 결과는 백천 가지 보응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금 대강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무리의 염부제 중생이 업을 느끼는 차별을 지장보살이 백천의 방편으로 교화하지만 이러한 모든 중생들이 먼저 이와 같은 보를 받은 뒤에 지옥에 떨어져서 겁수를 지내도 나올 기한이 없다. 이러므로 너희들은 사람을 보호하고 나라를 보호하여 이러한 모든 여러 업으로 하여금 중생을 미혹됨이 없게 하라.」 고 하셨다. 사천왕이 듣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탄식한 뒤에 합장하고 물러갔다.
풀이
여기서부터 염부제 중생의 업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업감이란 업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업감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있었지만 여기서는 굉장히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업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섬뜩하고 겁을 주는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안 듣는 중생을 위하여 강한 수단을 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호랑이가 온다고 겁을 주듯이 어떤 강한 방법을 쓰더라도 우는 아이를 달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사바세계에는 말 안 듣고 고집세고 자기 멋대로인 중생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 중생을 위해서는 때로는 겁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표현한 내용은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과보를 덮어씌우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듣기에 기분이 좋지 않은 그런 내용이 많습니다. 앞에서 마야부인이 지옥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울적했던 것과 같은 내용을 담은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우리에게 이런 강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지장보살은 사천왕에게 만약 살생하는 자를 만나면 전생의 재앙으로 단명의 아픔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겁주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실제로는 중생들의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살생은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명이나 병고는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병고에 오래 시달리는 사람을 보고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남의 생명을 많이 해쳤기 때문에 지금 그 과보로 병고에 시달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생과 단명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일날이나 제삿날 같은 날에 방생을 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건강에 보탬이 된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건강법은 보약을 먹어서 좋아지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돌보아 주거나 치료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평소에 많이 닦아 놓으면 자신의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건강법입니다. 아픈 사람을 건강해지도록 도와주면 자신의 건강이 향상된다는 사실은 매우 이치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법망경에도 간병복전(看病福田)이 제일복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도둑질하는 사람을 만나면 빈궁으로 고초를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이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재산을 빼앗았으니 자신이 가난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 사음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새와 비둘기와 원앙새가 되는 업보를 받는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악담하는 사람을 만나면 권속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과보를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담한다는 것은 친척들이 서로 다투게 되는 경우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남에게 모진 소리를 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훼방하는 사람을 만나면 혀가 없어지거나 입병이 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성내고 분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더럽고 파리해지는 병의 과보를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지장보살은 갖가지 과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장보살의 설법은 아주 강하고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지장보살은 죄업의 과보에 대해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지장보살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옥에 있는 중생들에게 설법한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이 지옥에 가 있는 중생들을 다룰려고 하다 보니 때로는 강하고 무섭게 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그런 지장보살과의 모습과는 조금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지장보살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지장보살의 인생이 자신의 인생이 되도록 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어떤 힘을 빌려서 그 힘에 의지해야 하지만 우리 신앙의 힘이 성장하면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자신의 힘으로 보살의 일을 해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장보살의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모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보살핌에 의해서 성장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까지 계속해서 그런 보살핌을 받는다면 오히려 귀찮아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발전하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람직한 신앙의 발전 형태입니다.
바카리 비구의 이야기를 담은 바카리비구경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바카리라는 스님이 병이 들어서 어느 신도집에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바카리비구는 부처님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소원을 신도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서 신도가 달려가서 부처님을 모셔 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따뜻하게 손도 잡아주시고 위로의 말을 합니다. 그랬더니 바카리는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릴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냉정하게 부처라고 하는 존재는 육신과 육신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다 늙어가는 육체에 예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이해시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 셨습니다. 법이란 곧 부처이고 부처란 곧 법입니다. 부처란 늙은 몸뚱이나 썩은 몸뚱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영원하고 따라서 법은 영원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처님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역사적인 부처님을 통해서 진정한 진리가 표현되기는 했지만 화신이란 본래의 독신불이 없었다면 허수아비와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물에 비친 그림자 달과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떠있는 진짜 달이 떠 있음으로 물에 비친 그림자 달이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역사적인 화신 부처님은 진정한 법으로서 부처님의 진리를 나타낼 때 달과 그림자의 관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장보살에 대한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장보살이라고 할 때에도 지장보살의 정신이나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지장보살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됩니다. 형상으로 깎아 놓은 것이 진짜 지장보살은 아닙니다. 그런데 형상에 마음이 이끌리면 신앙하는데 있어서는 편리함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저 지장경을 쓰거나 읽거나 지장보살의 그림을 그리거나 지장보살의 형상을 만들어 예배를 올리면 편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의 수준과 같은 신앙의 형태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신앙의 형태를 가졌다 하더라도 신앙이 성장해 갈수록 지장보살의 정신을 닮아 가려는 그런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장보살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장보살의 진정한 정신을 모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장보살이라고 하면 강인한 원력을 가진 보살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겨울이 춥고 땅이 꽁꽁 얼었다 하더라도 봄이 되면 그 딱딱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과 같은 그런 강인한 생명력 그것이 바로 지장보살의 정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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