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경 읽기
- 지장경-제1. 도리천에서 신통을 보이다. [忉利天宮神通品]
- 지장경-제2. 분신들을 모으다 [分身集會品]
- 지장경-제3. 중생들의 업을 인연을 관찰하다 [觀衆生業緣品]
- 지장경-제4. 염부제 중생들의 업으로 느낌 [閻浮濟衆生業感品]
- 지장경-제5. 지옥들의 이름 [地獄名號品]
- 지장경-제6. 여래가 찬탄하시다 [如來讚歎品]
- 지장경-제7.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이익함 [利益存亡品]
- 지장경-제8. 염라왕들이 찬탄하다 [閻羅王衆讚歎品]
- 지장경-제9.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 [稱佛名號品]
- 지장경-제10. 보시한 공덕을 헤아리다 [校量布施功德緣品]
- 지장경-제11. 땅의 신들이 법을 보호하다 [地神護法品]
- 지장경-제12. 보고 듣는 이익 [繭門利益品]
- 지장경-제13. 사람들에게 부촉하다 [囑累人天品]
도리천궁에서 일어난 일
도리천궁신통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 법을 설했는데 이 때 설법하는 장소에 갖가지 신통변화가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도리천궁에서 일어난 갖가지 신통변화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량세계의 불보살이 도리천의 법회에 모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찬탄합니다.
둘째, 부처님께서 빛이 찬란한 광명구름들을 일으키는데 그 이름들은 원만, 자비, 지혜, 반야, 삼매, 길상, 복덕, 귀의, 찬탄의 광명구름들입니다.
셋째, 부처님께서 육바라밀의 음성과 자비, 희사, 해탈, 무루, 사자후, 운뢰 등의 미묘한 음성을 냅니다.
넷째, 사바세계와 다른 세계에 있는 무수한 천왕, 용왕, 귀신, 귀왕 등이 몰려옵니다.
도리천궁신통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장보살이 오랜 세월을 지내 오면서 중생을 제도했으며, 또한 지금도 제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제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도리천궁신통품의 전체적인 줄거리
부처님께서 법을 설할 때 무수한 세계의 불보살이 몰려와 부처님을 찬탄하고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미묘한 광명과 음성을 놓고 시방 세계의 무수한 천신과 귀왕들이 몰려듭니다.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에게 이들은 지장보살이 아주 오랜 시간 전에 다 제도한 이들이라고 말하고 지장보살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믿음이 있으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만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지장보살의 첫 번째 본생담
지장보살의 첫 번째 본생담(本生談)
한량없는 세월이전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라는 부처님 시절에 한 장자의 아들이 있었는데 고통받는 육도(六途)의 중생을 갖가지 방편을 베풀어서 제도한 후에 불도를 이루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그 장자가 바로 지장보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그와 같은 원을 세우고 실천해온 이래 무량백천만억겁의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두 번째 지장보살의 본생담
또 한량없는 세월이전 각화정자재왕여래라는 부처님 때에 한 바라문의 딸이 있었는데 숙세에 많은 복을 지어 주위의 흠모와 옹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인과를 믿지 않고 많은 악업을 지어 지옥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딸이 부처님께 예배 공양한 공덕으로 삼매 속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지옥에 도착하고 지옥의 담당자인 무독귀왕으로부터 딸의 지성 덕분에 어머니가 천상에 태어났다는 말을 듣습니다. 부처님은 그 때 바라문의 딸이 지금의 지장보살이라고 말합니다.
도리천에 대한 설명
본문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忉利天하사 爲母說法이러니 爾時에 十方無量世界不可說不可說一切諸佛과 及大菩薩摩訶薩이 皆來集會하사 讚歎하시되 釋迦牟尼佛이 能於五濁惡世에 現不可思議大智慧神通之力하사 調伏剛强衆生하여 知苦樂法이라하시고 各遣侍者하사 問訊世尊하니라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어머님을 위해 설법하시었는데, 이 때에 사방에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많은 부처님과 큰 보살들이 모두 모여와서 찬탄하기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흐리고 험악한 세상에서 불가사의한 큰 지혜와 신통한 힘을 나타내시어 강강(剛强)한 중생들을 잘 다스려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치를 알게 하신다.”고 하면서 모두 시자들을 보내와서 세존께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강의
먼저 여기서 본문에 나오는 도리천에 대한 용어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도리천은 불교의 우주관 또는 천상관의 한 부분으로서 흔히 33천이라고도 합니다. 도리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제 2천을 말하는데 남섬부주(南贍部洲) 위에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도리천의 중앙에는 선견성(善見城)이 있는데 4면이 8만 유순이나 되는 큰 성입니다. 여기에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고 사방에 각기 8성이 있어서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방 8성이므로 모두 32성인데 제석천의 선견성을 더하여 33천이라고 합니다.
삼재일(三齋日)마다 성밖에 있는 선견당에 모여 법(法) 답고 법 답지 못한 일을 평가한다고 합니다.
도리천의 하루 밤낮의 시간은 인간의 일백년과 같으며, 하늘 사람의 키는 일 유순(14,4km), 옷의 무게는 매우 가벼워서 육수(六銖)가 된다고 합니다. 하늘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인간의 여섯 살 먹은 사람과 같고, 얼굴 빛은 원만하고 자연히 옷이 입혀져 있으며 보통 수명은 일천 세에 이른다고 합니다.
도리천에 관한 이야기로는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석달 동안 설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신통한 힘을 찬탄하며 문안 드리는 장면
이 단락은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는 자리에 많은 부처님과 대보살들이 모여 부처님의 지혜와 신통한 힘을 찬탄하며 문안 드리는 장면입니다.
많은 불보살들은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흐리고 험악한 세상에서 불가사의한 큰 지혜와 신통한 힘을 나타내시어 강강(剛强)한 중생들을 잘 다스려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치를 알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흐리고 험한세상[五濁惡世]이란 다섯 가지 부정한 것이 가득찬 악한 세상을 말하는데 오탁은 겁탁(劫濁), 견탁(見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명탁(命濁)입니다.
겁탁이란 시대 자체가 더러워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시대에 생기는 기아, 질병 등의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사회악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견탁이란 모든 삿되고 악한 사상이나 견해가 무성하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번뇌탁이란 욕심 내고 성 내는 등의 여러 가지 정신적인 악덕이 널리 퍼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로 중생탁은 중생의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자질이 떨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유정탁(有情濁)이라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명탁은 수탁(壽濁)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탁의 현상이 일어나는 시기를 말세라고 하는데 인간의 수명이 가장 긴 팔만 사천세로부터 점차로 감소해서 이만세에 이르면 점차로 오탁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오탁악의 세계에서도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입니다.
또 ‘강강중생’이란 고집세고 말을 안 들으며 억세기 때문에 다루기 힘든 중생이란 뜻인데 이러한 중생까지도 부처님께서는 잘 가르치고 다독거려 참다운 인간으로 교화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대목을 정리해서 설명하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괴로움과 즐거움의 근본 의미를 알게 하고 그들을 제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많은 불보살이 찬탄하여 시자들을 파견하여 부처님께 문안을 드리게 되는 장면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첫번째의 표현 - 광명
본문
是時에 如來含笑하시고 放百千萬億大光明雲하시니 所謂大圓滿光明雲과 大慈悲光明雲과 大智慧光明雲과 大般若光明雲과 大三昧光明雲과 大吉祥光明雲과 大福德光明雲과 大功德光明雲과 大歸依光明雲과 大讚歎光明雲이니라
해석
□ 이 때에 여래께서는 웃음을 머금고 백천만억의 대광명운을 놓았다. 이른바 크고 원만한 광명과, 큰 자비의 광명과, 큰 지혜의 광명과, 큰 반야의 광명과, 큰 삼매의 광명과, 큰 길상의 광명과, 큰 복덕의 광명과, 큰 공덕의 광명과, 크게 귀의하는 광명과, 크게 찬탄하는 광명이었다.
풀이
부처님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문제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앞에서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법문을 하려고 하는데 많은 불보살들이 문안을 드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웃음을 머금으시고 백천만억의 큰 광명을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열 가지 광명을 놓았다고 표현한 것은 지장경에 나타난 첫 번째의 부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을 나타내기 위한 한 가지 표현방법으로 광명을 말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찰에 가면 맨 처음으로 불자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법당에 가서 절을 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이 지장경에서 광명을 놓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광명의 의미를 이해하면 부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광명이란 부처님이 지니신 지혜의 빛을 뜻하며 그 광명이 경에서 소개한대로 여러 가지인 것은 부처님이 갖추신 덕이 그와 같이 여러 가지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광명운>이라 할 때 ‘운(雲)’자의 뜻은 많고 풍성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대원만 광명운, 대자비 광명운, 대지혜 광명운, 대반야 광명운, 대삼매 광명운, 대길상 광명운, 대복덕 광명운, 대공덕 광명운, 대귀의 광명운, 대찬탄 광명운의 열 가지 광명을 통해서 부처님의 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열’이라는 숫자는 가득 차서 원만하며 어떤 결손도 없이 완전무결하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그 빛나는 덕이 원만하고 완전무결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광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광명은 빛입니다. 빛은 바로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광명으로서 그 모습을 나타냅니다. 광명은 바로 진리의 몸, 그 자체를 기리킵니다. 또한 빛은 마음의 지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만약 우리에게 빛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빛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 즉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광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미혹한 사람을 이끌어가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광명이란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합니다. 부처님의 재산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광명으로 인해 중생을 제도하는 길을 열었고 경전을 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를 상징하는 뜻으로 광명을 나투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광명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을 가는데 마음으로부터 어떤 지혜의 빛이 없다면 매순간 우리는 상처투성이로 얼룩질 것입니다. 돌이켜서 과거에 숫한 상처받았던 일들을 살펴보면 지혜가 없었기 때문임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일 가는 재산은 바로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열 가지 광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옥의 개념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광명만이 지옥문을 활짝 열 수 있고, 광명만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라고 해서 어느 고정된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빛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어리석고 캄캄할 때 곧 지옥의 삶이 시작됩니다. 본 경에서 “지옥은 해의 빛도 달의 빛도 없는 어두운 곳에 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장경의 처음 부분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광명으로 표현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광명으로서 부처님의 큰 공덕을 찬탄하여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풀어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경전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속에 담겨 있는 심오한 뜻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을 읽을 때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깊은 내용을 잘 음미해야 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두번째의 표현 - 음성
본문
放如是等不可說光明雲已하시고 又出種種微妙之音하시니 所謂檀波羅蜜音과 尸羅波羅蜜音과 羼提波羅蜜音과 毗離耶波羅蜜音과 禪波羅蜜音과 般若波羅蜜音과 慈悲音과 喜捨音과 解脫音과 無漏音과 智慧音과 大智慧音과 師子吼音과 大師子吼音과 雲雷音과 大雲雷音이니라
해석
이와 같은 말로는 다 나타낼 수 없는 많은 광명을 놓으신 뒤에 또한 갖가지의 미묘한 음성을 내시었다. 이른바 단바라밀의 음성과, 시바라밀의 음성과, 찬제바라밀의 음성과, 비리야바라밀의 음성과, 선바라밀의 음성과, 반야바라밀의 음성과, 자비의 음성과, 희사의 음성과, 해탈의 음성과, 무루의 음성과, 지혜의 음성과, 대지혜의 음성과, 사자후의 음성과, 대사자후의 음성과, 운뢰 같은 음성과, 큰 우뢰 같은 음성이었다.
풀이
여기서는 부처님에 대한 두 번째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표현방법으로 광명을 놓으신 뒤 갖가지 음성으로 두 번째의 공덕인 가르침의 소리를 펼쳐 보인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그 깨달음[光明]과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音]뿐입니다. 아래에 소개되는 것은 수많은 가르침중에서 중요한 항목들입니다.
육바라밀
여기서 단바라밀음, 시라바라밀음, 찬제바라밀음, 비리야바라밀음, 선바라밀음, 반야바라밀음은 육바라밀을 나타냅니다.
단바라밀은 보시를 나타내는 것으로 재물을 베풀거나 두려움을 없애주고 가르침을 펴는 일을 통해 자신의 탐심을 끊고 집착을 떠나며 이웃의 가난함을 도와주는 윤리적 실천 강령을 말합니다.
시라바라밀은 지계를 나타내는 말로 불자로서 계(戒)와 율(律)을 견고히 지켜 악업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찬제바라밀은 인욕을 나타내는 것으로 타인으로부터 받는 모든 박해나 고통을 잘 참고 도리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고 제법(諸法)을 밝게 관찰하여 마음이 안주(安住)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리야바라밀은 정진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심을 가다듬고 힘써 선행, 특히 여러 바라밀을 꾸준히 실천하여 게으른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점점 더 발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선바라밀은 선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음이 산란하여지는 것을 멈추고 삼매를 행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고치어 모든 진리를 밝게 아는 예지와 여실(如實)한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자비음, 희사음은 자․비․희․사의 네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자비음, 희사음
이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 하고, 괴로움을 없애는 것을 비무량심(悲無量心)이라 하고,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희무량심(喜無量心)이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애증친원(愛憎親怨)의 마음이 없이 평등한 것을 사무량심(捨無量心)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사무량심을 닦음으로써 대범천(大梵天)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밖에 해탈음, 무루음, 지혜음, 대지혜음, 사자후음, 대사자후음, 운뢰음, 대운뢰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해탈음은 깨달음의 소리를 나타내며, 무루음은 모든 번뇌에서 이탈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른 소리를 나타냅니다. 또 지혜음과 대지혜음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는 소리를 말합니다. 사자후음과 대사자후음은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의 부르짖음에 비유한 말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그 어떤 삿댄 것이라도 능히 굴복시킬 수 있는 소리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끝으로 운뢰음과 대운뢰음은 부처님의 바른 말씀, 옳은 말씀, 진리의 말씀, 깨달음의 말씀은 마치 하늘의 번개와 천둥소리와 같음을 비유한 말로 결국 부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천둥소리와 같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운뢰음은 소리가 크다는 뜻이라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슴을 울리며 경종하는 말씀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락은 모두 부처님께서 실천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천하기를 강조하는 법문의 내용들입니다. 평소에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내용이라는 뜻에서 소리[音]를 내시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광명을 펼쳐 보이고 난 후 이어서 소리로서 중생 제도를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광명은 곧 깨달음이고, 소리는 곧 설법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는 바로 부처님의 재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까닭은 바로 부처님께서 이 깨달음의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며 또한 깨달음으로 인해 중생들에게 알맞는 법을 설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묶은 경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교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불교적인 실천을 행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과 설법, 이 두 가지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을 이야기 할 때 깨달음의 지혜와 중생을 향해 가르침을 펼친 설법이야말로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먼저 부처님의 광명을 소개하고 부처님의 온갖 소리를 나열해 놓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재산인 깨달음과 설법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천신이 모여 주위를 장엄하는 장면
본문
出如是等不可說不可說音已하시고 娑婆世界와 及他方國土에 有無量億天龍鬼神이 亦集到忉利天宮하니 所謂四天王天과 忉利天과 須燄摩天과 兜率陀天과 化樂天과 他化自在天과 梵衆天과 梵輔天과 大梵天과 少光天과 無量光天과 光音天과 少淨天과 無量淨天과 遍淨天과 福生天과 福愛天과 廣果天과 嚴飾天과 無量嚴飾天과 嚴飾果實天과 無想天과 無煩天과 無熱天과 善見天과 善現天과 色究竟天과 摩醯首羅天과 乃至非想非非想處天과 一切天衆과 龍衆과 鬼神等衆이 悉來集會하니라
해석
이와 같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소리를 내시니 사바세계와 다른 곳의 국토에 있는 무량억의 천신과 용과 귀신들도 또한 도리천궁에 모여 들었다. 이른바 사천왕천․도리천․수염마천․도솔타천․화락천․타화자재천․범중천․범보천․대범천․소광천․무량광천․광음천․소정천․무량정천․변정천․복생천․복애천․광과천․엄식천․무량엄식천․엄식과실천․무상천․무번천․무열천․선견천․선현천․색구경천․마혜수라천․내지 비상비비상천의 일체 천신 대중들과 용의 대중들과 귀신의 대중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강의
여기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천신이 모여 주위를 장엄하는 장면입니다.
사바세계와 다른 곳의 국토에 있는 무량억의 천신들과 용들과 귀신들이 도리천궁에 모여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온갖 하늘은 곧 불교의 천상관(天上觀)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그냥 천상이라 하지 않고 천상 세계에 낱낱이 이름을 붙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의 별들에게 갖가지 이름을 붙이듯이 하늘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막연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확실하고 과학적인 근거 위에서 법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천상의 온갖 나라에서 부처님의 설법 자리가 장엄되고 또 설법을 듣기 위해 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광명과 설법에 힘입어서 하늘 나라의 귀신들이 다 모여들어 법회가 시작되려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동참하고 있는 신들
본문
復有他方國土와 及娑婆世界의 海神江神과 河神樹神과 山神地神과 川澤神苗稼神과 晝神夜神과 空神天神과 飮食神草木神과 如是等神이 皆來集會하니라 復有他方國土와 及娑婆世界諸大鬼王하니 所謂惡目鬼王과 噉血鬼王과 噉精氣鬼王과 噉胎卵鬼王과 行病鬼王과 攝毒鬼王과 慈心鬼王과 慈心鬼王과 福利鬼王과 大愛敬鬼王인 如是等鬼王이 皆來集會하니라
해석
또 다시 다른 곳의 국토와 사바세계에 있는 바다의 신과 강의 신과 하천의 신과 나무의 신과 산의 신과 땅의 신과 천택의 신과 곡식의 신과 낮의 신과 밤의 신과 허공의 신과 천신과 음식신과 초목신과 같은 이러한 신들도 모두 와서 법회에 와서 모였다.
또 다시 다른 곳의 국토와 사바세계의 모든 큰 귀신의 왕들이 있었다. 이른바 무서운 눈을 한 귀왕과 피를 먹는 귀왕과 정기를 먹는 귀왕과 태와 알을 먹는 귀왕과 병을 뿌리고 다니는 귀왕과 독기를 거두어들이는 귀왕과 자비한 마음을 가진 귀왕과 복고 이익을 주는 귀왕과 매우 사랑스럽고 공경할 만한 귀왕등 이러한 귀왕들이 모두 와서 법회에 모였다.
풀이
여기서는 온갖 신들과 왕들을 나열하여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동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神)’이란 표현은 보살, 혹은 부처라는 말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해신이라 하면 해 그 자체가 바로 보살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해를 일광(日光)보살, 또는 일청자(日天子)라 하고 달을 월광(月光)보살, 또는 월천자(月天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는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무엇이나 다 위대하며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든 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수많은 신의 이름도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국토와 사바 세계에 있는 온갖 신들과 왕들이 법회에 모였다는 것은 곧 각계 각층의 사람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을 믿는 종족은 물론 그 어떤 이교도들도 전부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다 모여들었다는 뜻이며, 나아가서 일체 삼라만상들이 모두 진리라는 범주속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뜻입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훌륭한 성자가 나타나면 자기의 종교와는 상관없이 성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몰려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인도는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고 있으며 실지로 수많은 종교 행위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지장경을 설하는데 온갖 대중, 온갖 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들이 함께 동참하여 이 법회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묻다
본문
爾時에 釋迦牟尼佛이 告文殊師利法王子菩薩摩訶薩하시되 汝觀是一切諸佛菩薩과 及天龍鬼神가 此世界他世界와 此國土他國土에 如是今來集會到忉利天者를 汝知數否아 文殊師利가 白佛言하되 世尊하 若以我神力으로 千劫測度하야도 不能得知로소이다.
해석
그 때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법왕자 보살마하살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러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천룡과 귀신들을 보는가? 그리고 이 세계와 저 세계, 이 국토와 다른 국토에서 이와 같이 지금 도리천에 와서 법회에 모인 이들의 수효를 다 알 수 있겠느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저의 신력으로서는 천겁을 두고 헤아린다 하더라도 능히 그 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풀이
이 대목은 많은 대중이 모여 온 것에 대하여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묻고 있습니다. 많은 보살 중에서 문수보살에게 묻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수보살은 지혜 제일의 보살이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결하려면 그 일을 잘 알고 전담하는 담당자에게 묻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불보살과 천룡과 귀신, 이 세계와 저 세계, 이 국토와 저 국토에서 지금 이 도리천에 와서 법회를 하려고 모인 대중을 보고 문수보살에게 그 숫자를 알 수 있겠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문수보살이 자신의 힘으로는 천겁을 두고 헤아린다고 해도 능히 그 수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장보살의 위대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인 문수보살로서도 지장보살의 생애와 그의 법력과 원력을 설명하려는 법회에 모인 대중들의 수효를 알수 없다고 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지장보살의 원력이 정말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법회에 모인 대중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다
본문
佛告文殊師利하시되 吾以佛眼觀하여도 猶不盡數니 此皆是地藏菩薩이 久遠劫來에 已度當度未度하며 已成就當成就未成就니라 文殊師利가 白佛言하되 世尊하 我已過去에 久修善根하여 證無碍智일새 聞佛所言하고 卽當信受어니와 小果聲聞과 天龍八部와 及未來世諸衆生等은 雖聞如來誠實之語하야도 必懷疑惑하며 設使頂受하야도 未免興謗하리니 唯願世尊은 廣說地藏菩薩摩訶薩의 因地에 作何行하며 立何願하여 而能成就不思議事하소서
해석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처의 눈으로 보더라도 오히려 다 헤아리지 못한다. 이들은 모두 지장보살이 구원겁에서부터 이미 제도했거나 지금 제도중이거나 앞으로 제도할 이들이며, 이미 성취시켰거나 지금 성취중이거나 앞으로 성취시킬 이들이니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선근을 닦아서 걸림이 없는 지혜를 증득 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곧 당연히 그대로 믿겠습니다만 수행이 적은 성문과 천룡팔부와 미래세의 모든 중생들은 비록 여래의 진실한 말씀을 듣더라도 반드시 의혹을 품을 것이며, 설사 받들어 가지드라도 비방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다만 바라옵건데 세존께서는 지장보살마하살이 처음 수행할 때[因地]에 어떠한 수행을 지었으며 어떠한 서원(誓願)을 세워서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였는지 널리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풀이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눈으로 보더라도 법회에 모인 대중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문수보살만 모르는 게 아니라 부처님 자신도 대중들이 너무 많아서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곧 지장보살의 위대한 원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대중이 모인 것은 지장보살이 오랜 세월 전부터 제도했거나, 아니면 제도하는 중이거나, 앞으로 제도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 많은 대중들은 이미 성취시킨 사람도 있고 지금 성취 중인 사람도 있고 앞으로 성취할 사람이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문수보살은 많은 대중이 지장보살의 위신력으로 모였다고 하니 다시 묻습니다. 문수보살은 자신은 과거로부터 선근을 닦아서 걸림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장보살에 대한 이야기를 마땅히 믿고 받아들이겠지만 수행이 부족한 성문과 천룡팔부와 미래세의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성실하신 말씀을 듣더라도 반드시 의혹을 품을 것이고 설사 받아들인다해도 비방이 일어날 수 있으니 지장보살의 인지(因地), 즉 처음 수행한 일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장보살의 인지란 바로 지장보살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씨앗, 혹은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장보살이 될 수 있었던 최초의 인연을 말합니다. 문수보살의 물음은 지장보살이 과거세에 어떤 행을 했고 어떤 원력을 세웠기에 그와 같은 훌륭한 원력을 성취시킬 수가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지장보살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수보살이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지장보살의 원력에 관한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서원이 얼마나 컸으면 문수보살과 부처님까지도 헤일 수 없는 그 많은 숫자의 대중이 모였는지 각자 한번쯤 의문을 가져보는 것도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모든 대중들이 지장보살의 서원으로 모여 온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면 지장보살에 관한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이를테면 지장보살이 어떻게 하여 정업(定業)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는지, 또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어떻게 거뜬히 극복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원력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은 바로 생명력입니다. 생명력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가장 근본 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꿈이요, 희망이요, 기대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꿈이며 희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어떤 기대감이 없다면 살아가는 맛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삶은 살아있다고 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삶을 지탱시켜주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력은 곧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원력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원력의 정도에 따라 문제 해결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서원이 강하면 아무리 큰 업장이라도 녹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아무리 작은 돌이라도 그냥 물속에 던지면 가라앉고 맙니다. 그러나 큰 돌도 배에다 실어서 물이 띄우면 가라앉지 않습니다. 여기서 배란 돌의 무게를 받혀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의 원력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력이 강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흔히 우리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는 수가 있는데 이 업타령을 원력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업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도 실은 원력하나로 가능합니다.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기 보다 강한 원력으로 업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원력은 바로 그런 적극적인 삶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바람직한 가르침에만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편으로 설해 놓은 바람직하지 못한 가르침에는 의지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처방을 갖고 여러 사람들에게 똑 같이 약으로 쓰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업을 강조하는 소승불교를 의지하지말고 원력의 삶을 강조하는 대승의 가르침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부처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실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업도 중요하고 인연도 소중하지만 업(業)타령만 계속하고 있으면 바람직한 불교가 되지 못합니다. 강인한 원력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제대로 된 불교를 배울 수 있고 부처님의 마음에 맞는 불교를 수행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전생에 지은 업(業)대로만 살아가는 소극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강인한 원력을 갖고 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무거운 돌과 같은 업이라도 배라고 하는 원력이 있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업장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원력의 힘이 크면 인생이 결코 잘못될리 없습니다. 그러한 이치가 바로 원력의 힘입니다. 큰 원력의 상징인 지장보살이 결정된 업까지도 소멸시킨다는 원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난 후 깨달음을 얻겠으며,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으며, 자신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라는 지장보살의 원력은 원력 중에서도 최고의 원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문수보살은 지장보살이 도대체 어떤 원력을 세웠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지장보살의 그 강인한 원력을 열거해서 열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장보살의 정신이 담긴 세 가지 표현 속에는 지장보살의 강인한 원력, 곧 하늘을 뒤덮는 충천한 원력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바로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나서 깨달음을 이루겠고,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고,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는 대원력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지장경의 사상이며 지장보살의 정신입니다.
지장보살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이유
우리는 지장경 공부를 하면서 지장보살의 정신을 배워서 적극적이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지장경을 공부하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원력은 바로 지장보살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지장보살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곧바로 원력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력으로 인해 힘이 솟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장경 공부이며 지장기도입니다. 우리가 지장경을 공부하면서 새삼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비록 문제의 연속이지만 그 문제들을 극복하고 대처하는 한 방법으로서 강인한 원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장보살과 같은 강인한 원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의 가르침에 의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마음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근본 성품인 지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다 갖추고 있는 우리들 마음의 근본적인 지혜를 잘 다스림으로써 크나큰 원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원력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장경의 내용은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내용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의 사상으로 승화시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장보살의 원력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 원력이 각자의 가슴속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장경을 공부하는 근본 취지는 우리도 지장보살의 원력을 닮아 그 원력을 펼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함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장보살의 인지
서원을 처음 세울때의 내용
본문
佛告文殊師利하시되 譬如三千大千世界에 所有草木叢林과 稻麻竹葦와 山石微塵에 一物一數로 作一恒河하고 一恒河沙一沙로 一界하며 一界之內一塵으로 一劫하고 一劫之內所積塵數를 盡充爲劫하야도 地藏菩薩의 證十地果位以來컨대 千倍多於上喩어든 何況地藏菩薩이 在聲聞辟支佛地리요
해석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 보살에게 말씀하시되 “비유하자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풀과 나무와 숲과 벼와 삼과 대나무와 갈대와 산과 돌과 작은 먼지의 이 많은 것 중에, 한 가지 물건을 하나로 계산하고, 그 하나를 한 개의 항하강으로 여겨서 한 항하강의 모래 하나하나를 한 세계라고 하고, 그 한 세계 안에 있는 한 개의 먼지를 일 겁으로 삼고, 그 한 겁 동안 쌓여지는 먼지의 수를 모두 겁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지장보살이 십지과위(十地果位-보살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를 증득하여 서원을 행한 것은 위에서 비유한 수보다 천배도 더 많거늘 하물며 지장보살이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지위에서 행한 수행들이야 어찌 다 말 할 수 있으리오.”
풀이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앞에서 문수보살이 지장보살의 인지(因地), 즉 서원을 처음 세울때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삼천대천 세계에 있는 풀과 나무와 총림과 도마와 죽위와 산과 돌과 미진 등 갖가지 물건의 많음을 자세히 나타내기 위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장보살의 원력을 헤아려 보려고 해도 지장보상이 십지과위를 증득한 이래 위에서 비유한 수보다 천배나 더 많다고 하니 그것을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십지과위는 불교에서 수행의 과정에 따라 나누는 단계를 나타낸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못난 중생에서부터 최고의 인격자인 부처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열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대승불교로 넘어 오면서 화엄경 같은 경에서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주 그리고 등각과 묘각을 합쳐서 오십이위, 혹은 오십오위로 나누기도 합니다.
중생에서부터 부처의 경지를 좀더 세분화 한 것은 부처님은 너무 훌륭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 단계를 높여 놓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 내면의 차원은 다른 것이며, 불교를 안다고 하는 것도 개개인의 공부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깊이와 넓이는 그 사람의 위치와 성격 그 동안의 불교에 대한 상식과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자세히 세분시켜 나누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서는 지장보살이 그 동안 보살행을 실천한 세월이 한없이 길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의 원력은 무한한 세월 이전부터 원력이 심어져 있었으며 그 원력은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文殊師利여 此菩薩의 威神誓願은 不可思議니 若未來世에 有善男子善女人이 聞是菩薩名字하고 或讚歎커나 或瞻禮커나 或稱名커나 或供養커나 乃至彩畵刻鏤塑漆形像하면 是人은 當得百返生於三十三天하야 永不墮惡道하리라
해석
문수사리여! 이 보살의 위신력과 서원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만약 미래세의 선남자와 선여인이 있어 이 보살의 이름을 듣고 혹 찬탄하든지, 혹 우러러 예배하든지, 혹 이름을 일컫든지, 혹 공양하든지, 아니면 그림으로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여 만들거나 칠을 올리게 되면 이 사람은 마땅히 백번이라도 삼십삼천에 태어나서 영원히 악도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풀이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문수보살에게 지장보살의 위신력과 서원은 엄청나게 커서 생각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수행역정이 너무나 훌륭하니까 지장보살에게 찬탄하고 예배를 하면 그 공덕이 많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미래세의 많은 대중이 지장보살의 이름을 듣고 우러러보고 예배하거나 이름을 한번 부르거나 어떤 종류의 공양을 하든지 간에 그 사람은 도리천에 태어나고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찬탄, 첨례, 칭명, 공양, 그림, 조각, 색칠하는 일은 지장보살에 대한 존경과 원력을 닮으려는 실천 방법입니다. 지장보살을 섬기는 일이 우러러 보고 예배하는 작은 행위에서부터 조각하고 색칠하는 큰 행위의 일까지 그 공덕은 쌓인다는 것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중국이나 한국 보다 지장신앙이 훨씬 성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에 불자들이 작은 천조각 같은 것을 걸쳐 놓았는데 그것이 전부 공양물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공양물 하나라도 바치면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지장보살과 같은 훌륭한 공덕을 가진 분에게 매달리는 것은 하루에도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작은 파리처럼 마침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죄가 매우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 놓으면 같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동타지옥(同墮地獄)’이란 표현을 씁니다. 반대로 자신의 공덕은 비록 적지만 공덕이 아주 수승한 사람과 인연을 맺어 놓으면 함께 극락에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력이 상대방 보다 수승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쉽게 나쁜 길로 빠져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장보살과 같은 훌륭한 성인에게 공덕을 짓고 올바른 법을 배운다면 바람직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헛고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 바람직한 길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바른 길을 택했다고 하는 확신이 섰을 때는 공덕을 쌓는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수행이 없는 원력은 별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지장보살의 본생담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지장보살의 과거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현재의 지장보살은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서 나투셨다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과거 전생
본문
文殊師利여 是地藏菩薩摩訶薩은 於過去久遠不可說不可說劫前에 身爲大長者子러라 時世有佛하니 號曰獅子奮迅具足萬行如來라 時長者子가 見佛相好千福莊嚴하고 因問彼佛하되 作何行願하야 而得此相이니까 時獅子奮迅具足萬行如來가 告長者子하시되 欲證此身인데 當須久遠에 度脫一切受苦衆生하라하니라
해석
문수사리여! 이 지장보살하마살은 과거 구원세인 말로서 할 수 없는 겁전에 몸이 장자의 아들이 되었다. 그 때의 부처님이 계셨으니 호를 「사자분신구족 만행여래」라고 하였다. 그 때 장자의 아들이 부처님의 상호가 천복으로 장엄함을 보고 인하여 그 부처님에게 묻기를 「어떠한 행원을 지어서 이러한 상을 얻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때의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께서 장자의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몸을 증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구원한 세월 동안 일체의 고를 받는 중생들을 득도 해탈시켜야 된다.」고 하시었다.
풀이
이것은 지장보살의 과거 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보살에게 지장보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입니다.
지장보살은 과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말로서는 할 수 없는 세월 이전에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 때 부처님의 얼굴이 거룩한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상호가 좋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얼굴은 원만 구족하기 때문에 상호라고 표현하는데 상은 삼십이상을 가리키고, 호는 팔십종호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부처님의 상호가 천복으로 장엄된 것을 보고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본생 인연이었던 장자가 부처님께 어떤 행원을 지어 그렇게 됐는지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원이라 하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자의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을 받는 일체중생들을 모두 득도 해탈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많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잘난 모습은 결국 중생들을 제도시킨 원력 때문에 나타난 것이지 달리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자의 아들은 부처님의 상호를 보고 감동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상견중생(相見衆生)이라 해서 모양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의 상호 이야기
부처님의 상호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들도 자신의 얼굴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못 생겼다고 조상을 원망하거나 부모를 탓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공덕을 닦으면 얼굴이 바뀌어져 버립니다. 얼굴이 바뀐다고 해서 진열장 속의 마네킹처럼 달라지는 게 아니라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선행과 공덕이 쌓인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꾸 그 옆에 가고 싶고 무언가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보살행을 열심히 닦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상호가 원만 구족한 이유가 다름 아닌 중생을 득도, 해탈케 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의 개인적 목적은 결국 해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고통이나 문제로부터 해탈하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까지도 해탈시켜 주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예불을 할 때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고 말합니다. 계,정,혜 삼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그런 다음에 해탈지견입니다. 해탈지견은 해탈에 대한 소견을 말합니다. 해탈에 대한 소견은 다른 사람도 해탈시키겠다는 그런 마음을 뜻합니다.
해탈이란 바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벗어난다는 것은 바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관념이 벗어날 때 마침내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탈이란 고정관념을 깨어 벗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해탈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오래전에 먹을 게 귀하던 시절, 오대산 상원사에서 겨울 결제를 마치고 해제 때 다섯 명이 남아서 산 적이 있습니다. 식구가 적어서 소임을 돌아가면서 맡아 했는데 어느 스님이 공양주와 채공 소임을 맡았습니다. 반찬이라곤 짜디짠 무김치 한 가지로 겨울을 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무김치 한 가지로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한 가지 재료이지만 온갖 조화를 다 부려 늘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스님은 무김치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늘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해탈의 개념을 적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가사의하고 오묘해서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의 첫 번째 전생 이야기
본문
文殊師利야 時長者子가 因發誓言하되 我今盡未來際不可計劫에 爲是罪苦六道衆生하여 廣說方便하야 盡令解脫하고 而我自身이 方成佛道하리라하고 以是於彼佛前에 立斯大願하야 于今百千萬億那由陀不可說劫에 尙爲菩薩하니라
해석
문수사리여! 그 때 장자의 아들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맹서를 발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부터 미래세의 헤아리지 못할 겁이 다할 때까지 이러한 죄로 고생하는 육도의 중생을 위하여 널리 방편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 해탈하게 하거나 자신도 꼭 불도를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부처님앞에서 이러한 대원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백천만억 나유타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겁을 지내도 오히려 보살이 되어 있다.
풀이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문수보살에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장자의 아들은 미래세의 헤아리지도 못할 세월이 흐르더라도 죄악으로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 나서 자신은 불도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원을 세웠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대로 보살의 몸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장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냥 보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장보살은 우리 중생 때문에 성불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첫 번째 전생 이야기입니다.
지장보살의 두 번째 전생 이야기
본문
又於過去不可思議阿僧祇劫에 時世有佛하니 號曰覺華定自在王如來라 彼佛壽命은 四百千萬億阿僧祇劫이라 像法之中에 有一婆羅門女하니 宿福深厚하여 衆所欽敬이며 行住坐臥에 諸天衛護하더니 其母信邪하여 常輕三寶어늘 是時聖女가 廣說方便하야 勸喩其母하야 令生正見하되 而此女母는 未全生信이러니 不久命終하여 魂神墮在無間地獄하니라
해석
또한 과거의 사의할 수 없는 아승지겁 때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호를 각화정자재왕여래라 하고 그 부처님의 수명은 사백천만억 아승지겁이나 된다. 상법 가운데 한 바라문의 여자가 있어 숙세의 복이 심후하여 뭇사람들이 공경하는 바이며 행주좌와에 제천이 호위하였다. 그 어머니가 사도를 믿어 항상 삼보를 가볍게 여기었으므로 이 때에 성녀가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그 어머니를 권유하여 그로 하여금 정견이 생기게 하였지만 이 여자의 어머니는 완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목숨을 마침에 혼신이 무간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다.
풀이
여기서부터 지장보살의 두 번째 전생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오랜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때 부처님을 각화정자재왕여래라고 불렀고 수명은 사백천만억아승지겁이나 되었습니다. 그 상법 가운데 한 바라문의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법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의 시대를 말합니다.
흔히 시대를 구분 지울 때 정법, 상법, 말법 시대로 나눕니다. 정법시대는 부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을 일컫는 말이고, 상법시대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얼마동안의 기간을 말하고, 말법시대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많은 세월이 지난 동안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상법 시대에 한 바라문의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공덕을 많이 닦아 뭇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걸어다닐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모든 하늘들이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삿댄 것을 믿어 삼보를 비방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삿댄 길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한번 그릇된 길로 접어들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바라문의 어머니가 잘못된 길로 빠져든 것을 보고 바라문의 딸은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바른 소견을 갖게 했습니다.
여기서 방편이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장경에서는 방편을 통하여 무언가를 얻고 배워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른 소견은 바로 정견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무리 훌륭한 명예를 가졌다고 해도 인생에 대한 바른 소견을 갖지 못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에 대한 바른 안목이야말로 그 어떤 재산보다 값진 것입니다.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에게 바른 소견을 갖게 했지만 어머니는 완전한 믿음을 얻지 못하고 죽어서 마침내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
본문
時婆羅門女가 知母在世에 不信因果라 計當隨業하야 必生惡趣라하고 遂賣家宅하야 廣求香華와 及諸供具하야 於先佛塔寺에 大興供養이라가 見覺華定自在王如來하니 其形像이 在一寺中하되 塑畵威容이 莊嚴畢備어늘 時婆羅門女가 瞻禮尊容하고 倍生敬仰하여 私自念言하되 佛名大覺이라 具一切智시니 若在世時런들 我母死後에 當來問佛이면 必知處所리라하니라
해석
그 때 바라문녀는 어머니가 세상에 계실 적에 인과를 믿지 아니했으니 마땅히 업에 따라 악취에 날 것을 짐작하여 알고 드디어 가택을 팔아서 향과 꽃과 모든 공양의 기구를 널리 구하여서 선불의 탑사에서 크게 공양을 올리다가 각화정자재왕여래를 뵈오니 그 형상이 한 절 가운데 계시되 불상과 탱화의 위엄스러운 얼굴이 단정하고 엄숙함이 구비했거늘 그 때 바라문녀가 높으신 얼굴에 첨례하고 경앙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생겨서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이름은 대각이라 일체지를 갖추었으니 만약 세상에 계셨더라면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만일 와서 부처님께 물었으면 반드시 나신 곳을 알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풀이
계속해서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그 때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가 세상에 계실 때에 인과를 믿지 않아 업에 따라 악취에 떨어질 것을 미리 짐작했습니다. 여기서 악취라고 하는 것은 악한 갈래 즉, 악한 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지옥, 아귀, 축생 등 여러 가지 악한 길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악취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지 아니한 나쁜 길들을 말합니다.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가 악취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집을 팔아서 향과 꽃과 모든 공양구를 구하여 부처님의 탑과 절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앞에서 나온 각화정자재왕여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형상이 절 가운데 계셨는데 불상과 탱화의 얼굴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라문의 딸이 부처님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깨달음을 얻어 지혜를 갖추었으니 만약 세상에 계셨더라면 어머니가 어느 곳에 나신 지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가끔씩 살다가 답답하고 앞길이 캄캄해서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를 때 부처님께 물어보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딸도 부처님께 어머니가 죽어서 어디에서 다시 태어났는지 물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문의 딸이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
본문
時婆羅門女가 垂泣良久하며 瞻戀如來하더니 忽聞空中聲曰泣者聖女여 勿至悲哀하라 我今示汝母之去處하리라 婆羅門女가 合掌向空하며 而白天曰是何神德이건대 寬我憂慮이니까 我自失母已來로 晝夜億戀하되 無處可問知母生界이니다 時空中有聲하여 再報女曰我是汝所瞻禮者의 過去覺華定自在王如來니 見汝憶母倍於常情衆生之分일새 故來告示하노라
해석
이 때 바라문녀가 오래도록 슬피울며 여래를 쳐다 보면서 염하였더니 홀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오기를 「우는 자 성녀야,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의 어머니의 간 곳을 보여 주마.」하였다.
바라문녀가 합장하고 공중을 향하여 하늘에 아뢰기를 「이 어떠한 신의 덕으로 저의 우려를 풀어 주시려 합니까?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밤낮 생각하였으나 어머니의 태어나신 세계를 물어서 알 곳이 없었습니다.」
그 때 공중에서 소리로 두 번째 알려주기를 「나는 바로 네가 첨례하던 바로 과거의 각화정자재왕여래다. 네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이 보통 중생의 정보다 갑절이나 됨을 보았으므로 와서 너에게 고시 하노라.」고 하였다.
풀이
이 대목에서는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가 간 곳을 몰라 오랫동안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음을 알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입니다.
바라문의 딸은 공중에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어머니가 계신 곳을 보여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바라문의 딸은 하늘을 향해 어떠한 은덕으로 자신의 걱정을 들어주려는 것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밤낮 생각하였으나 어머니의 태어나신 세계를 물어볼 곳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중에서는 바라문의 딸에게 음성을 들려주는 사람은 과거에 바라문의 딸이 예배를 올렸던 각화정자재왕여래라고 밝히고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이 남다름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바라문녀는 일심으로 부처를 염하다
본문
婆羅門女가 聞此聲已하고 擧身自撲하여 支節皆損커늘 左右扶侍하니 良久方蘇하여 而白空曰願佛慈愍하사 速說我母生界하소서 我今身心이 將死不久로소이다 時覺華定自在王如來가 告聖女曰汝供養畢하고 但早返舍하여 端坐思惟吾之名號하면 卽當知母所生去處하리라
해석
바라문녀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들어 스스로 부딪혀서 지절이 모두 상하였으므로 좌우에서 붙들어 모시니 오랜만에 깨어나서는 공중을 향하여 아뢰기를 「원하옵건데 부처님께서는 사랑으로 불쌍하게 여기시어 빨리 저의 어머니가 태어난 세계를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의 지금의 심신은 오래지 않아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때 각화정자재왕여래께서 성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공양을 마치거던 다만 일찍이 집으로 돌아가서 단정하게 앉아 나의 명호를 생각하면 곧 너의 어머니가 태어나서 간 곳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풀이
바라문녀는 공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서 온몸을 부딪치며 감격해 합니다. 여기서 지절이라는 말은 몸이 부딪쳐서 상했지만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아픈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너무 반가운 일이 있으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몸을 부딪치며 크게 기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각화정자재왕여래께서 바라문의 딸에게 말하기를 집으로 돌아가 단정하게 앉아 여래의 명호를 생각하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명호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일념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라문의 딸은 염불하는 힘 때문에 지옥세계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을 이런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험난한 세파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불교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바른 가르침에 의지한다면 세상이 아무리 혼란하고 힘들더라도 절대 흔들리거나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문의 딸이 지옥에 가서도 두려움이 없는 것은 결국 불교의 바른 가르침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의 딸은 부처님의 이 말을 듣고 한없이 기쁜 마음을 가집니다.
꿈결에서 지옥의 모습을 보게 되다
본문
時婆羅門女가 尋禮佛已하고 卽歸其舍하여 以憶母故로 端坐念覺華定自在王如來하되 經一日一夜러니 忽見自身이 到一海邊하니 其水湧沸하고 多諸惡獸하되 盡復鐵身으로 飛走海上하여 東西馳逐커든 見諸男子女人百千萬數가 出沒海中타가 被諸惡獸의 爭取食噉하며 又見夜叉하대 其形各異라 或多手多眼이며 多足多頭라 口牙外出하되 利刃如鉤하여 驅諸罪人하야 使近惡獸하며 復自搏攫하여 頭足相就커던 其形萬類라 不敢久視러라 時婆羅門女는 以念佛力故로 自然無懼러라
해석
이 때 바라문녀는 곧 부처님께 예배하기를 마치고 곧 그의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에 단좌하여 각화정자재왕여래를 염하면서 하룻밤 하루 낮을 지내더니 문득 자기 몸이 한 바닷가에서 이르렀는데, 그 물이 끓어오르고 많은 악한 짐승들이 모두 쇠몸을 하고 해상을 날아 다니면서 동서로 쫓아다니고 모든 남자와 여인 백천만 명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다가 여러 악한 짐승들에게 다투어 가며 잡아 먹히는 것이 보이며, 또한 야차의 모양이 각각 달라서 손이 많은 것과 눈이 많은 것과 발이 많은 것과 머리가 많은 것과 어금니가 밖으로 튀어 나와서 날카롭기가 칼날같은 것들이 여러 죄인을 몰아서 악한 짐승들에게 가깝게 대어주며 다시 스스로 치고 받아서 머리와 다리가 서로 엉키는 등 그 모양이 만 가지나 되어 감히 오래 볼 수가 없었다. 그 때 바라문녀는 염불하는 힘 때문에 자연 두려움이 없었다.
풀이
바라문녀의 딸은 집으로 돌아와 일념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하룻밤 하 룻낮을 지냈다는 것은 비몽사몽간을 헤매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꿈결에서 지옥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첫번째 지옥으로 야차의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야차의 세상은 물이 끓어오르고 많은 악한 짐승들이 쇠로 된 몸을 하고 바다 위를 날아다니면서 동서로 쫓아다니고 모든 남자와 여인들이 바다 가운데 들어갔다 나왔다가 하다가 그 악한 짐승들에게 다투어 가며 잡아먹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야차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은 손과 눈과 발과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고 어금니가 밖으로 튀어나와서 칼날 같이 날카로우며 주인들을 몰아서 악한 짐승들에게 잡아먹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옥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서로 모함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이것은 바로 야차와 나찰의 지옥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금횡령은 물론이고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지옥의 세계가 현실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아수라나 아귀들이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며, 또 이렇게 헐뜯고 저렇게 헐뜯으며, 이리로 붙었다 저리로 붙었다 하는 모습이 지금 우리 현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경전에 있는 이야기는 경전의 내용을 빌려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장 리얼하게 표현해 놓은 것으로 법화경의 화택(火宅)의 비유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한쪽에서는 불이 나고 있는데 그 불난 집 속에는 온갖 독충이 들끓고 수많은 짐승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아우성치고 있는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런 엉망진창이 된 모습들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그려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지옥처럼 각박하고 혼란스럽다 해도 우리가 슬기로서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는 불교 공부의 중심이 바로 서 있다면 어떤 두려움도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구심점을 놓쳐 버리면 우리는 어느 곳에 곤두 박힐지 모릅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예와 재산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의 어떤 구심점이 없고 인생의 무게를 나 아닌 다른 곳에 싣고 살아가면 한꺼번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불자는 명예나 재산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낱 먼지나 아침이슬, 또는 저녁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돈벌이를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때가 되면 그것은 다 무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모든 것이 무상함을 느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소한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기둥을 잡고 아무리 뺑뺑이를 돌아도 기둥만 놓치지 아니하면 나가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둥을 놓쳐 버리면 어딘 가로 곤두박질 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본문에서 바라문의 딸은 염불하는 힘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옥에 가서 정말 험한 모습을 봤지만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의 힘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고 많은 가르침과 종교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좋은 사람 만나고 좋은 학교에 가고 명예를 얻고 지위를 누리고 영광을 누렸다 하더라도 불법을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불교와 인연 맺은 것, 다시 말해 부처님과 인연 맺은 것은 크나큰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신의 인생을 세세생생 지켜주고 잡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의 인연 맺음은 세속적인 인연 맺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 - (1)
지옥에 무엇이 있는가
본문
有一鬼王하되 名曰無毒이라 稽首來迎하며 白聖女曰善哉라 菩薩何緣來此이니까 時婆羅門女가 問鬼王曰此是何處이니까 無毒答曰此是大鐵圍山西面第一重海니라 聖女問曰我聞鐵圍之內에 地獄在中이라 是事實不이까 無毒答曰實有地獄이니라 聖女問曰我今云何로 得到獄所니까 無毒答曰若非威神이면 卽須業力이니 非此二事면 終不能到니다
해석
한 귀왕이 있어 이름을 무독이라 불렀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와서 성녀를 영접하면서 하는 말이 「착하신 보살이시여,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이 때 바라문녀가 귀왕에게 묻기를 「이곳은 어디입니까」 무독이 대답하기를 「이곳은 대철위산의 서면에 있는 첫째 중해입니다.」
성녀가 묻기를 「나는 들으니 철위산 안에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무독이 대답하기를 「실제로 지옥이 있습니다.」
성녀가 묻기를 「내 지금 어찌하여 지옥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무독이 대답하기를 「만약 부처님의 위신력이 아니면 곧 업력일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니면 끝내 이곳에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풀이
이 대목에서는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한 귀왕이 있어 무독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무독귀왕은 지장경을 예불할 때 나오는 귀신왕의 이름입니다. 무독귀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지옥을 찾은 바라문의 딸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독귀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죄를 지어 끌려 온 사람 같지 않아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 정중히 물었습니다. 바라문의 딸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이냐고 물었습니다. 무독귀왕이 대답하기를 대철위산의 서쪽에 있는 첫째 겁의 바다라고 대답합니다. 바라문의 딸은 지옥세계의 궁금한 것을 계속해서 묻습니다. 철위산 안에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또 묻습니다. 무독대왕은 지옥이 실제로 있다고 대답합니다. 바라문의 딸이 또 묻기를 자신이 어찌 하여 지옥에 오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무독대왕은 위신력이 아니면 업력이 아니면 도처히 올 수 없는 곳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경우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형무소에 가는 것도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지어서 가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업보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위신력으로 면회를 가거나 교화하러 갈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죄인을 위안하러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위신력에 의해서 지옥을 보러가는 것입니다. 무독대왕은 위의 두 가지 경우가 아니면 지옥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 - (2)
사람에게 지옥이 어디인가
본문
聖女又問하되 此水何緣으로 而乃湧沸하며 多諸罪人과 及以惡獸니까 無毒答曰此是南閻浮提造惡衆生의 新死之者로 經四十九日하되 無人繼嗣爲作功德하여 救拔苦難하며 生時又無善因일새 當據本業所感地獄하여 自然先度此海하며 海東十萬由旬에 又有一海하되 其苦倍此하고 彼海之東에 又有一海하되 其苦復倍라 三業惡因之所招感일새 共號業海니 其處是也니다
해석
성녀가 또 묻기를 「이 물은 무슨 연유로 끓어 오르며 여러 죄인들과 악한 짐승들이 많습니까」
무독이 대답하기를 「이것들은 염부제에서 악을 지은 중생들로 새로 죽어서 사십 구일이 지내도록 그 자식이 망자를 위해 공덕을 지어서 고난으로부터 구제해 줄 사람이 없으며 살았을 때 또한 선한 착한 인연이 없으므로 마땅히 본업의 감득에 따라 지옥으로 가려면 자연 이 바다를 건너야 되며 바다 동쪽에 십만유순을 지나면 또 하나의 바다가 있는데 그곳의 고통은 이곳보다 갑절이나 되며 그 바다의 동쪽에 또 하나의 바다가 있는데 그곳의 고통은 다시 배가 됩니다. 삼업악인이 불러서 가득한 것이므로 함께 업해라고 부르는데 그곳이 바로 여깁니다.」
풀이
이 대목에서도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바라문의 딸은 지옥의 모습에 대해서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히 묻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다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절에서 사람이 죽으면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지내는데 그 사십구재의 어원이 바로 이 지장경에서 나왔습니다. 지장경 공부를 하면 자신의 업보에 관한 것과 사십구재에 관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그런 사실에 대한 근거가 바로 지장경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십 구일이라고 하는 것은 칠일을 일곱 번 지내서 칠 곱하기 칠을 해서 사십 구가 됩니다.
그 기간은 말하자면 업보를 심사하는 유예기간에 해당됩니다. 과거의 업보에 대해 검증하고 확인하는 기간입니다. 세속의 법에서 현행범도 현장검증을 하고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뒤에는 우리의 죄업에 대한 검증 기간으로 사십 구일이 걸리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외인 경우는 극악극선(極惡極善), 즉 선행이 확실하거나 악행이 확실한 사람은 바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지극히 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판은 일종의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그 점은 현실세계와 지옥세계가 똑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사십구일 동안 영혼이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것은 업보의 결과가 쉽게 판결 내려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십 년 간 이 생에 애착을 가지고 온갖 인연으로 얼기설기 얽혀서 살다가 몸이 죽었다고 해서 영혼이 쉽게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온갖 미련이 있고 애착이 남아 끊지 못할 인연들 때문에 영혼은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바로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바른 공부를 한다면 죽음과 동시에 좋은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정통으로 공부하면 죽은 후에 자기의 갈 길을 다 닦아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확신에 차서 불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하면 염라대왕도 필요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갈 길을 자기가 알아서 가기 때문에 어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십 구일이 될 때까지 죽은 자를 위해서 재를 지내 주고 법문을 들려 주고 경을 읽어 주어 공덕을 닦으면 그 힘으로 좋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지옥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세계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판결을 받기 전에 손을 쓰면 병보석으로 풀려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십 구일이라는 일정한 기간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십 구일이라는 기간은 돌아가신 분을 위하여 유족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하고 보람있는 일로 재를 지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크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가신 분에게 짐만 지워드리는 꼴이 됩니다. 불교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가장 보탬이 되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사십구재의 이치를 바로 안다면 죽은 자에게 훨씬 유익한 일이 됩니다. 죽은 자를 위해 삶과 죽음의 원리를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에 의해서 우선 재를 지낸 사람이 지혜로워집니다. 그 다음으로 죽은 자가 복을 짓지 못한 것을 대신 짓게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법보시 한다든지 공양을 대접한다든지 아니면 불우이웃을 돕거나 무의탁노인을 돕는 일을 하면 가장 좋습니다. 그런 행위는 돌아가신 분을 대신해서 복을 지어 드리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사람의 이름으로 그런 복을 지어 줌으로써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쳐서 지혜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십구재를 지내는 재문 속에는 경전에서 좋은 구절을 전부 뽑아서 염불로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사십구재의 재문 속에는 금강경 사구게, 법화경 사구게, 화엄경 사구게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경전 속의 아주 중요한 경구들만 뽑아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좋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밝아져서 지혜의 눈이 열려 해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벗어나는 어떤 소견이 열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십구재를 지내는 첫째 목적입니다.
사십구재의 두번째 목적은 죽은 자를 대신해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공덕을 지어 주면 그 사람이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상당히 보탬이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복을 짓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지만 후손들이 복을 지어 드릴 수 있는 일로서 사십구재의 본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자기가 지은 업대로 지옥을 가려면 반드시 첫째 겁의 바다를 건너야 된다고 말합니다. 또 바다 동쪽에 상당히 긴 거리를 지나면 또 하나의 바다가 있는데 그 곳의 고통은 첫째 바다보다 갑절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바다의 고통도 다시 배가 된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무독대왕은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로 짓는 업, 즉 삼업으로 인해서 악한 어떤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자신이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옷을 많이 껴 입으면 날씨가 추운 것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면 지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지은 대로 지옥의 존재여부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업을 지어서 느끼는 세계가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데 악업을 짓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옥이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자면 악업을 지은 사람에게는 지옥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악업을 짓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지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의 의미입니다.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 - (3)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업이 무엇인가
본문
聖女又問鬼王無毒曰 地獄何在니까 無毒答曰 三海之內是大地獄이라 其數百千이로되 各各差別하니 所謂大者는 具有十八하고 此有五百하되 苦毒無量이며 此有千百하되 亦無量苦이니다 聖女又問大鬼王曰我母死來未久이오니 不知魂神이 當至何趣니까 鬼王이 問聖女曰菩薩之母는 在生習何行業이니까 聖女答曰我母邪見하여 譏毁三寶하며 設或暫信하여도 旋又不敬하더니 死雖日淺이나 未知何處니다 無毒問曰菩薩之母는 姓氏何等이니까 聖女答曰我父我母는 俱婆羅門種이니 父號尸羅善見이오 母號悅帝利니다
해석
성녀가 또 귀왕 무독에게 묻기를 「지옥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독이 대답하기를 「삼해 안이 바로 대지옥이며 그 수는 백천이고 각각 차별이 있는데 그 중에서 크다고 하는 것이 모두 십팔 개이며 다음이 오백 개로 그 고통과 독은 헤아릴 수 없으며 다음이 천백 개로 또한 한량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성녀가 또 대귀왕에게 묻기를 「내 어머니가 죽어서 온지 오래지 않은데 혼신이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귀왕이 성녀에게 묻기를 「보살님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떠한 행업을 익혔습니까」
성녀가 대답하기를 「내 어머니는 삿된 소견으로 삼보를 기롱하고 훼방했습니다. 설혹 잠시 믿는 척 하다가도 곧 또한 불경을 저지르곤 했으니 죽은지 아직 일천 하지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독이 묻기를 「보살님의 어머니 성씨가 무엇입니까」
성녀가 대답하기를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모두가 바라문 종인데 아버지는 시라선견이라 부르고 어머니는 열제라 부릅니다.」
풀이
이 대목에서도 무독대왕과 바라문의 딸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독대왕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지옥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산 안에 바로 대지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온갖 지옥의 종류와 지옥의 숫자가 나옵니다. 무독대왕은 그 지옥의 수는 백천 개이고 각각 종류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가 죽어서 지옥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데 혼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독대왕이 성녀에게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떠한 행업을 익혔는지 묻습니다.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신분을 알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무독대왕은 지옥을 관장하고 있는 왕으로 혼신을 찾으려면 살아 있는 동안 행한 업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가 삿댄 소견으로 삼보를 기만하고 훼방했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삿댄 소견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가진 게 많거나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바른 소견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이렇게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의 죄업을 낱낱이 보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무독대왕은 어머니의 성씨를 물었습니다. 바라문의 딸은 아버지는 시라선견이며 어머니는 열제리라고 대답합니다.
본문
無毒合掌하고 啓菩薩曰願聖者는 却返하사 無至憂憶悲戀하소서 悅帝利罪女生天以來로 經今三日이니다 云承孝順之子爲母하여 設供修福하되 布施覺華定自在王如來塔寺하니 非惟菩薩之母得脫地獄이라 應是無間에 此日罪人은 悉得受樂하여 俱同生訖이니다
해석
무독이 합장하고 보살께 여쭈어 말하기를 「원하건데 성자께서는 돌아가시고 너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열제리 죄녀가 천상에 태어난지가 지금 삼일이 지났습니다. 효순한 자식이 어머니를 위해 공양을 베풀어 복을 닦아 각화정자재왕여래의 탑사에 보시했다고 하니 다만 보살의 어머니만 지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응당이 무간지옥에 있던 이날 죄인은 모두 즐거움을 얻어 받아서 함께 천상에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풀이
이 대목은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에 대한 신상을 바탕으로 해서 무독대왕이 지옥의 장부를 펼쳐서 조사를 해보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지옥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기록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것처럼 무독대왕은 바라문의 딸의 어머니에 대한 조사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독대왕은 너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열제리라는 죄인은 천상에 태어난지 삼일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가 간 곳을 알아보려고 지옥까지 갔는데 삼일전에 천상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합니다.
무독대왕은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를 위해 공양을 베풀고 복덕을 쌓아 바라문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무간지옥에 있던 죄인은 모두 즐거움을 얻어 함께 천상에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 지옥에서 벗어날 때 그 기운으로 같이 있던 사람들이 함께 업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한 사람이 복을 많이 지으면 다른 사람들도 복이 많은 사람 쪽으로 이끌려가서 덕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문의 딸은 복을 많이 짓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서 그 어머니가 천상에 태어난 그날 죄값을 받던 다른 죄인들도 함께 천상에 태어났다고 설명 합니다.
스님들이 축원하여 천도할 때 주인이 있는 영가나 주인이 없는 영가나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영가들이 다 함께 천도되도록 하는 내용의 축원문을 읽습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서 한 사람만 천도될 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인연들을 모두 같이 천도되도록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판소리 가운데서 심청전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심봉사만 눈을 뜨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맹인들이 함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천상에 난다는 이런 대목의 의미는 불교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엄경의 도리입니다. 하나를 통하면 전체가 다 통하고 한 중생이 제도하면 만 중생이 다 제도되는 불교의 도리는 너무나 심오합니다.
바라문의 딸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들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크게 원력을 세우다
본문
鬼王言畢에 合掌而退커늘 婆羅門女尋如夢歸하여 悟此事已하고 便於覺華定自在王如來塔像之前에 立弘誓願하되 願我盡未來劫토록 應有罪苦衆生을 廣說方便하여 使令解脫케하리다하니라 佛告文殊師利하시되 時鬼王無毒者는 當今財首菩薩是요 婆羅門女者는 卽地藏菩薩是니라
해석
귀왕이 말을 마치자 합장하고 물러나니 바라문녀는 곧 꿈같이 돌아와서 이러한 일을 깨닫고 문득 각화정자재왕여래의 탑상 앞에서 큰 서원을 세우기를 「원컨대 나는 미래겁이 다하도록 응당 죄고가 있는 중생을 위하여 널리 방편을 베풀고 그돌로 하여금 해탈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시기를 「그 때의 귀왕무독은 지금의 재수보살이요, 그 때의 바라문녀는 곧 지금의 지장보살이니라」고 하시었다.
풀이
본문에서 무독대왕은 말을 마치자 합장하고 물러납니다. 바라문의 딸은 꿈같이 돌아와서 처음 했던 것처럼 염불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바라문의 딸은 각화정자재왕여래의 탑 앞에서 크게 소원을 세웁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가서 죄값을 받는 중생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라문의 딸은 바로 원력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과 연관지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문의 딸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기도를 했지만 당장에 어머니가 천상에 가 있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먼저 지옥의 험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기도를 하거나 공을 들이면 당장에 좋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장경에서 보았듯이 처음에는 안 좋은 모습이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좋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장에 기도를 하고 난 후 바로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때때로 더 어려운 경우를 맞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바라문의 딸은 기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모습을 먼저 보게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중에 물러서는 잘못됨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라문의 딸이 비록 지옥의 모습을 먼저 보긴 했지만 급회전해서 어머니가 천상에 태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서 천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크게 원력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바라문의 딸이 고통받는 중생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제도하겠다는 그런 원력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지금까지 지장보살의 두 가지 전생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지장보살의 처음 전생 모습은 장자의 아들이 되었고, 나중에는 바라문의 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별별 사람으로 다 변할 수 있습니다. 바라문의 딸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더욱 극적이고 우여곡절을 겪는 연극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라문의 딸은 여자의 모습인데 오히려 남자보다 더 강인하고 더 굳세고 더 큰 원력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장보살의 많은 전생 인연 중에서 두 가지 인연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큰 소원을 세우게 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큰 소원이란 다름아닌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해탈시키겠다는 대원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지장보살이 되게 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에게 무독대왕은 제수보살이며 바라문의 딸은 지금의 지장보살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지장보살의 두 가지 과거를 소개하는 장면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것이 바로 지장경의 첫품인 도리천궁신통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경전을 읽으며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전에 담긴 교훈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전을 읽으면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대목을 놓치지 않고 음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교훈적인 부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부분을 마음에 새기면서 경전을 자꾸 읽고 또 읽으면서 기도의 한 방편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장경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올바른 사상과 부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원력으로 자기 자신에게 중심을 두는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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