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 읽기
천수경 우리말 독송 (관세음보살)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구업을 청정케 하는 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오방내외 신중을 편안하게 모시는 진언) 나무 사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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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수경 책머리
『천수경』은 많고 많은 경전 가운데서 우리와 가장
친숙한 경전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처음 접하는 초심자는 물론이고
오랜 연륜이 쌓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불교공부를 하는 동안은
내내 독송하며 만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천수경』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어머님 같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한 마음과 위신력을
그 중심 사상으로 하는 경전인 까닭에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전인 것입니다.
또한 『천수경』속의 <진언>이나 <다라니>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 불교의 밀교적 신앙 형태를
잘 반영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수경』은 불자들 사이에서 가장 일반화되어 있어며,
가장 많이 읽히며,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이런 의미 있는 경전을 출간하게 되어 무척 기쁘고
큰 보람을느낍니다.
『천수경』은 그동안 여러 법회에서 강의한 것을 정리하여
「불일회보」에 연재해 왔었는데 ,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풀이하고 해설을 덧붙여
이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불자들이 그 인연으로 날마다 새롭게
신심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는 보람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책을 출판해 주신 불일출판사의 청학 스님과
강의 테이프를 풀어서 정리해 준 대광명 보살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불기 2536 10월
금정산 범어사 西祗殿
無比 합장
『천수경』의 위치
■한국 불교의 밀교적 요소
한국 불교를 특징지위 말할 때 흔히
대승 불교, 혹은 선불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불교, 가장 발달된 불교로 꽃을 피웠던 대승 불교가
선불교와 함께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그 두 가지가 합쳐져 있는 양상이 바로 한국 불교입니다.
그래서 흔히 한국불교는 모든 불교적 내용을
전부 지니고 있다고 해서 통불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불교는 소승 불교, 대승 불교, 선불교 등 여러 가지
불교적 특성을 골고루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로서 한국 불교에서 선불교는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절에서는 흔히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입정(入定)이라고 하여
참선에 해당되는 고요한 시간을 갖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참선공부에 열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며,
그 삼매를 통해 바람직한 지혜가 생긴다고 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서도
정은 그 중심에 들어 있습니다.
정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로 참선인데 한국 불교는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또 다른 일면으로 대승 불교를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후기 대승 불교의 특색에는
그 안에 밀교적 색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공부하려고 하는 『천수경』도
다분히 밀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밀교경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흔히 대승 경전의 대표적 경의 하나로 꼽을 수 있고,
우리가 너무도 잘 외우고 있는『반야심경』은 연기(緣起)의 기본이 되는
공사상(空思想)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에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문이 바로 밀교의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대승 불교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며, 부처님의 모든 진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화엄경』에서도 선재동자가
50선 지식을 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안에는 밀교적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이 정식과목으로 공부하는
『능엄경』에도 '능엄주'라고 하는 주문이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밀교적 색채의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능엄주'는 오로지 참선에만 전념하는 선방에서도 독송하여
참선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습니다.
'능엄주'를 외우는 일 자체는 선이 아니라 밀교의 색채를 띤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살펴볼 때 한국 불교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신행 활동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밀교적 요소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사찰에서 낙성식을 하거나 상량식을 할 때
『천수경』속의 〈다라니〉를 적어서 걸어 놓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도량을 옹호하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불교신자들 중에서는 정초가 되면 '옴마니 반메훔'이란 진언을 몸에 지니거나
집안에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또한 밀교적 분위기의 신앙생활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한국 불교 안에는 참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는 밀교적 색채가 상당히
뿌리 깊게 스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비밀스러운 한 부분으로 특징 지워져
그러면 대승 경전 속에는 왜 밀교적인 부분이 필요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반야심경』에서 공(空)에 대한 도리를 모두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지막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고
하는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범어로 결론을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 철학을 다 설명했지만 그래도 어디엔가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말하자면 모두 다 드러내 놓으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감추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심리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선사 스님들도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법문을 하시고는 주장자를
높이 들어 한번 치면서 '이 도리를 알겠는가'라든지 '할(喝)'이라고 하여
기어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남겨 놓습니다.
이처럼 법문을 구색에 맞게 제대로 해 놓고는 주장자를 내리 치거나
들어 보이면서 그 뜻을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뜻이 우리가 모를 이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비밀스러운 어떤 한 부분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원리인지도 모릅니다.
밀교라고 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마지막 꽃을 피운 한 부분입니다.
부처님게서는 『법화경』에서 모든 설법을 남김없이 다 마치신 후에
그것이 모두 방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게 방편이었다고 선언하시면서도 끝에 가서는 결국 알지 못하는
진언(〈다라니〉을 한쪽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밀교의 흔적입니다.
그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한 부분을 해석해 보아도
본문과 크게 다르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예로 요즈음에는 『반야심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주문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또 웬만한 책에는 모두 해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뜻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우리의 인체에서도
감춰 놓은 부분이 별 것은 아니지만
으레 감춰놓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선사 스님께서 법문을 마치고 주장자를 높이 드는 것이나
대승 불교의 마지막 꽃을 피운 밀교적인 현상도
결국은 그러한 원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뜻을 알고 보면 그렇게 깊은 뜻도 아니고 몰라야 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를 위시해서
『반야심경』에서 보이는 주문이나 『능엄경』의 '능엄주'등에서 보듯이
진언의 그 뜻을 해석해 놓고 보면 알아서는 안 될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불교신자들도 이런 점에 눈을 떠야 합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알려지는 세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비밀이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 뜻을 모르고 외워온 진언들도 이제는
그 내용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천수경』속에는 '진언'혹은 '다라니'라고 하는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천수경』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뜻도
요즈음에는 법회 등에서 해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여겨왔던 다라니를 해석함으로써
그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신심이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서 언제부터인가 사찰에서 제사를 지낸다거나
의식을 행할 때 우리말로 해석된 의식문을 같이 읽으면서
의식을 집행할 때가 많아졌습니다.
뜻을 알고 행하면 마음과 정성이 거기에 담기게 되어
훨씬 더 집중이 잘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수경』의 뜻을 풀이해서 이해하는 일은
신앙심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 제일 중요한 경전 『천수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집대성한 것을 팔만대장경이라고 말합니다.
팔만대장경을 책으로 만들면 그 부피가 엄청난 양이될 것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입니다.
불·법·승 삼보 중에서도 특히 법보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법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글로 승화되어 남겨진 것이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는 경전입니다.
『천수경』은 팔만대장경 속에 들어 있는 것 중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다 지니고 있고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경전이
바로 『천수경』입니다.
그러면 많고 많은 경전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천수경』이
왜 그토록 많이 읽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많이 읽히는 것으로 보면 팔만대장경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경전이라고 말해도 가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 『천수경』은 불교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일반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전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다양한 불교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불교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천수경』을 판매해서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천수경』은 어떤 의식에서든지 맨 먼저 읽히는 경전이기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이고,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일 중요한 경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천수경』은 대승 불교를 수용하고 있는 한국 불교에서
불자들의 신앙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경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식탁에서 매일 대하는 밥이나 국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먹는 것이 밥과 국이듯 『천수경』이
우리 마음에, 신앙에, 정신에 밥과 국처럼
스며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천수경』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대하게 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은 그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경전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어떤 부정한 것이나 꺼림칙한 것들도 모두 청소가 되어
청정해지는 위신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은 교리적인 면보다는 신앙적인 색채가 짙은 경전에 속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신앙의 근간이 되어온 『천수경』을
섣불리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신심이 더욱 향상된다면 그것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천수경』의 사상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본받아야
『천수경』의 본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 원만 무애대비 심대 다리니 경』인데
그것을 줄여서 그냥 『천수경』이라고 부릅니다.
경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사상을 담고 잇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수경』 의 주인공은 관세음보살이며,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자비스럽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감싸 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천 개의 손과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찌 천 개의 손과 눈뿐이겠습니까?
천만억 손과 눈으로도 오히려 부족한 것입니다.
결국 천 개의 손과 눈은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온갖 소리를 굽어 관찰하시며
그 소리를 헤아려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문제를 통해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그런 것을 통해서 지혜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눈을 뜸으로써 인생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고통과 어려움과 문제들을 모두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앞으로 공부하게 될 『천수경』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심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수용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자비하신 어머니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천수경』은 외우기 좋도록 재구성된 것인데 반해
팔만대장경 안에 있는 원래의 『천수경』은 그 양이 훨씬 많습니다.
본래의 『천수경』에서 열 가지 원(願)과 여섯 가지 향(向)과 대다라니를 발췌하여
의식을 집행할 때 독송하는데 적합하도록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것이
바로 우리가 자주 접하는 『천수경』입니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신앙심 또한 깊습니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경전입니다.
또한 『천수경』공부를 통해 교리적인 면포닥 관세음보살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당나라 때 소동과의 누이동생으로 소소매(蘇小妹)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지은 글 중에 『관음예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을 찬탄하고 자비를 표현한 매우
아름답고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수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지한(智閑) 스님이 번역한 것을 몇 편 인용하면서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지심정례공양
중생의 세상
백천억 국토마다
자제하신 몸 달같이 나투시니
짝할 바 없네
무량한 저 자비여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관세음보살5>중에서
지심정례공양
메아리 응답하듯
부르는 소리 낱낱이 찾아
고통 구해 주시고
천강에 밝은 달 비치듯
소원 발하는 이마다
큰 안락 주시는 이여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이 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한 중생에 팔만의 병고요
한 중생에 팔만의 번뇌인데
항하사 중생의 고통
모두 씻어 주시는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관세음보살6>중에서
지심정례공양
금강석
그 견고하고 맑은 신심과
어린아이 진실하고 고운 그 마음 모아 놓고
묘한 진리 남김없이 말씀하시는 이여
가야 할 고향이여
극락 저 청정한 보배 궁전에
대세집살보다 위에 계시는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 소서
아쉬울 것 없도다
천의 손이여
당신 잊고 있을 때도 감싸 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도다
외로울 것 없도다
천의 눈이여
당신 찾기 전에도 돌봐 주시니
나 이제 더 이상 외로울 것 없도다
깊고 맑은 삼매의 눈으로
삼계가 본래 청정 아시옵나니
보읍는 그 눈이 청정함이라
<관세음보살7>중에서
자심 정례공양
안락의 주인이시여
우러르면 이미 성스러운 신통 보이시고
이익 주시는 이여
구하면 어느새 이 몸 거둬 주시니
범부의 말과 생각이
미칠 곳이 아님이라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시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주소서
뜨는 해 진리의 음성이여
기뻐 떠는 삼천세계
걸림 없는 묘한 말씀으로
진리 밝게 설하심이여
온갖 중생 원과 바람
자비 바람으로 답하시고
법계의 중생 중생을
그렇듯이 건져 주시네
<관세음보살8>중에서
『천수경』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를 통하여
바람직한 삶을 제시해 주는 경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과 관련지어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관세음보살에 대해 기도를 할 때도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무심히 기도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는 마음속에 온갖 번뇌가 가득한 경우가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찾을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으면 그뿐입니다.
기도 할 때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관세음보살이 소원을 들어 주려고 해도
색깔이 온전치 못하여 소언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방송을 들으려면 듣고자 하는 곳의 채널에
맞추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영험을 받으려면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수경』이 비록 짧은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얕거나 짧은 것이 아닙니다.
『천수경』은 앞으로도 우리가 늘 가까이 대할 경전이며,
그 속에 담긴 관세음보살의 사상은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서 일상생활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
무비스님 천수경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