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칠구지 불모 대준제보살
「나무 칠구지 불모 대준제보살(南無七俱脂佛母大准堤普薩)」(3번)
여기서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이며,〈칠구지〉의〈구지〉는 '억'이란 뜻이니 그 뜻을 새겨 보면, '칠억 부처님을 키워낸 부처님의 어머니인 대준제보살께 귀의합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법계(法界),즉 우리가 사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진언의 내용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옴 남」(3번)
〈옴 남〉에서〈옴〉은 앞에서 여러 번 나왔으므로 여기서는 그 뜻풀이를 생략하기로 하고, 〈남〉은〈람〉이라고 해야 하는데 '화대(火大)의 종자'란 뜻입니다. 화대의 종자란 바로 불을 일으키는 근본 씨앗이란 뜻인데, 그것은 지혜의 불인 것입니다. 그 불의 종자가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생긴 우리의 번뇌 망상을 다 태워버리고 깨달음의 문에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법계를 청청하게 하는 것입니다.
호신진언(護信眞言)
「옴 치림」(3번)
〈호신진언〉은 글자 그대로 몸을 보호하는 진언인데, 〈옴 치림〉은 〈옴 쓰림〉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모든 길상이〈치림〉이란 글자에서 나옵니다. 길상이란 행복, 영광, 번영, 안녕, 평화 등 좋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보호한다고 해서 신장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좋은 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普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
「옴 마니 반메 훔」(3번)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을 풀이하면 '관세음보살의 본래 마음은 미묘하며 그것은 여섯 자로 되어 있는데 크고 밝은 왕의 진언'이란 뜻입니다. 이 진언은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고 집에 붙여 놓기도 하는 매우 인기 있는 진언입니다.
〈옴 마니 반메 훔〉에서〈옴〉의 뜻은 생략하기로 하고 〈마니〉는 '마니구슬'이란 말로써 '여의주'와 같은 뜻입니다. 여의주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보물인데 그것은 누구나 똑같이 지니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반메〉는 원래〈빠드메〉라고 해야 하는데 그 뜻은 '연꽃'입니다. 연꽃 중에서도 홍연(紅蓮)에 해당합니다.
연꽃의 본성은 어느 곳에 처하든지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도 이 연꽃처럼 항상 청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연꽃은 바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인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는 관세음보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수행을 쌓아서 이상적인 인물이 되었을 때도 연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격체가 바로 연꽃입니다.
결국 '여의주'나 '연꽃'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본래 마음답게 오롯이 간직할 때 그것은 바로 지혜의 자비와 온갖 생명과 광명이 있는 불보살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훔〉은 이구청정(離坵淸淨)이라고 해서 '더러움을 벗어난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뜻합니다. 즉, 번뇌 망상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음으로부터 미심쩍은 음식을 먹을 때는 먹기 전에 음식에다 〈홈〉자를 쓰고 먹기도 했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진언은 단 한 번을 외워도 육십이억항하사 보살님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준제진언(准提眞言)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3번)
이 〈준제진언〉은 다른 진언에 비해 매우 강한 진언에 속하며, 그 뜻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진언입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까지는 본격적인 진언의 시작은 아닙니다.
그 뜻을 풀이해 보면,〈나무〉는 '귀의한다'가 되고, 〈사다남〉에서〈사다〉는 칠, 일곱'이란 뜻이며,〈남〉은 복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삼먁삼못다〉에서〈삼먁삼〉은 '정등(正等)'의 뜻이며〈못다〉는 '붓다' 즉 '부처'라는 뜻이니,〈삼먁삼못다〉는 '천만억' 혹은 '억(億)'이란 뜻이며, 〈남〉은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입니다. 그래서〈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을 붙여서 해석하면, '칠억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가 됩니다. 그 다음의〈다냐타〉는 '(진언을) 곧 설(設)해 가로되'라는 뜻이니 바로 다음에 진언이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이 진짜 〈준제진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해석을 살펴보면,〈옴〉의 뜻풀이는 생략하기로 하고 〈자례〉는 '동회존(同回尊)' '유행존' 즉, '움직이고 흘러 다니는 분이시여'라는 뜻입니다.
〈주례〉는 '두상(머리) 정계존(頂계尊)이시여'라는 뜻인데 정계란 제일 높은 부처님의 이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준제〉는'묘의(妙意) 청정존이시여'라는 뜻이며, 〈사바하〉는 '원만, 성취'의 뜻을 지니고 잇는 종결어미입니다. 〈부림〉은 '정륜왕의 종자'란 뜻인데 정륜왕은 머리에 힘을 지닌 대장격에 해당됩니다. 이상으로〈준제진언〉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맨 마지막에 나오는 진언인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준제진언〉은 진언 자체가 지극히 강하고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준제진언〉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간절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금지송대준제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첫째, 둘째 구절인〈아금지송 대준제, 즉발보리광대원〉을 해석하면, '내가 지금 대준제진언을 외워 지니노니 곧 보리심을 발하고,
넓고 큰 원을 발해지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넷째 구절인〈원아정혜속원명, 원아공덕개성취〉의 내용을 살펴보면 '원컨대 내가 삼매를 통해서 정과 혜가 원만히 밝아지고 크고 작은 모든 공덕이 다 성취되어지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다섯째, 여섯째 구절인 〈원아승복변장엄, 원공중생성불도〉를 풀이하면, '원컨대 내가 훌륭한 복으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되고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위의 내용과 연관 지워 평소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는 반드시 소원을 발해야 함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원이 너무 많아 기도하러 가면서부터 내낸 소원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속해서 소원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입니다. 망상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에 쫓아가다 보면 올바른 기도가 되지 않고 결코 소원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소원은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와 마지막 끝날 때 한 번씩만 생각하고 기도 자체에만 일념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오롯한 정신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힘이 솟아나고 또한 그 힘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대상이 관세음보살이라면 그 관세음보살과 자신의 힘이 하나로 통일될 때 자유자재로 그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로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보내는 방송과 받는 방송이 성질이 같아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 속에도 이미 불보살의 힘과 똑같은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그 힘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불보살과 자기 자신이 하나의 주파수로 통일된 상태가 바로 진짜 기도인 것입니다.
그 힘은 곧 우주에 충만만 힘이며, 부처님의 힘이며, 자기 자신의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확한 주파수를 찾지 못하는 것은 기도를 하면서 자꾸 소원을 생각하는 망상에 끄달리기 때문입니다.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도 그 자체로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마음가짐이며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여래십대발원문〉또한 원력을 나타낸 구절인데, 원력이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 원력이 없는 사람은 생명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힘은 곧 원력이고, 원력은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이상 여래의 열 가지 큰 원력을 발하는 글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지니기도 하지만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 발원인〈원아영리삼악도〉는 '원컨대 내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영원히 떠나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발원인〈원아속단참진치〉는 '원컨대 내가 탐.진.치 삼독을 빨리 끊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문제라도 이 삼독에서 비롯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 삼독의 사슬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발원인〈원아상문불법승〉은 '원컨대 내가 항상 불. 법. 승 삼보에 대해 듣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넷째 발원인〈원아근수계정혜〉는 '원컨대 내가 항상 계. 정. 혜 삼학을 열심히 닦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발원인〈원아항수제불학〉은 '내가 항상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모든 부처님이란 나에게 있어서 스승이 되는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세상에는 스승 안 될 것이 없고, 또한 어느 때 어떤 곳에서라도 배울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여섯째 발원인 〈원아불퇴보리심〉은 '원컨데 내가 깨달음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이든 조금 하다가는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인생에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용맹심이야말로 우리의 생명력을 충족시켜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적어도 불교인이라면 어떤 일에서든지 물러서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 나가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불퇴심만 있으면 본 궤도에 오른 것과 같습니다.
일곱째 발원인〈원아결정생안양〉은 '원컨대 내가 반드시 안양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안양국이란 극락세계를 뜻하는 말로써 모든 것이 충족되어진 세계를 가리킵니다.
여덟째 발원인〈원아속견아미타〉는 '원컨대 내가 속히 아미타불을 친견하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무한한 생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한량없는 무한한 생명을 친견하려면 자기 자신이 무한해야 하는데 우리의 본래 자성은 이미 한량없는 무한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일이 바로 불교공부의 핵심인 것입니다.
아홉 번째 발원인〈원아분신변진찰〉은 '원컨대 나의 몸이 먼지처럼 많고 많은 곳에 두루 나투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내 몸이 미진수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누어져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소원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 발원인〈원아광도제중생〉은 '내가 모든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소원이나 발원, 축원의 맨 마지막에는 이처럼 항상 모든 중생이 다 함께 성불하게 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구절이 따라다닙니다.
불교는 연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자기 혼자만의 길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원리적으로 따져볼 때 다 함께 성불하는 것만이 자기 자신의 성불도 가능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중생제도의 관점 - 가관,중도관,본래부처
불교에서 중생제도의 관점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관(假觀)이라 하며,
중생은 본래는 없는 것인데 중생이 있다고 생각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는 것을 중도관(中道觀)이라 합니다.
가장 정상적인 생각은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인데 그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수경』의 내용은 소원과 원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만큼 진언이나 다라니의 구절구절에는 원력을 성취시킬 만한 힘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수경』이란 바윗덩이란 속에는 곳곳에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진 보석이 박혀있는 것입니다.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이상은 법회가 끝나면 반드시 외우는 서원으로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맨 처음의〈중생무변서원도〉는 '중생이 끝이 없지만 맹세코 제도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의〈번뇌무진서원단〉은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끊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의〈법문무량서원학〉은 '법문이 한량없지만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네번째의〈불도무상서원성〉은 '부처님의 도가 높고 높지만 맹세코 이루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나머지 네 구절은 앞의 네 가지 서원과 연결해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교 공부란 이미 자신 속에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일깨우고, 눈을 뜨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성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고 불도를 닦기를 원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불도인 것입니다.
법문 하는 장소에 가서 법문을 듣는 일은 결국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를 비춰보고 자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자성을 일깨울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훌륭한 불교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지식이 법문을 한다 해도 자기 마음속에 담겨 있는 자성 법문에 귀 기울일 줄 모르면 그것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실체는 자기 자신의 본래 성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나 불보살님은 그런 길이 있다고 단지 가르쳐 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첫 번째의〈자성중생서원도〉는 '자성 속에 있는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두 번째의〈자성번뇌서원단〉은 '자성 속에 있는 번뇌를 맹세코 끊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의〈자성법문서원학〉은 '자성 속에 있는 법문을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의〈자성불도서원성〉은 '자성 속에 있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흔히 불교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더 이상 아무 닦을 것이 없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수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곧 부처인 줄 안다면 반대로 부처인 중생은 맹세코 제도해야 합니다. 또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있지만 보리인 번뇌를 맹세코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원(願)에 대한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불자로서 가장 올바르게 발원하는 마음가짐은 바로 우리 자신이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인생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원을 갖고 있습니다. 원은 희망이며, 기대이며, 포부입니다. 그래서 원은 곧 생명력입니다. 인간에게 원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늙음과 젊음이 차이도 나이에 관계없이 바로 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 많지만 그중에서 영원히 젊게 살 수 있는 비결이 그 안에 있습니다. 불교는 항상 기대감을 가지고 살도록 가르치고 있는 종교입니다. 지금 처해 있는 환경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내생에는 틀림없이 좋은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과 기대를 주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원력은 우리에게 의욕을 가져다줍니다. 육체적 생명이 다할 때까지는 순간순간 원력을 갖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젊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천수경』 속에는 수없이 많은 원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내재된 생명력을 일깨우는 소리입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곳에서 힘찬 생명력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발원이 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3번)
〈발원이 귀명례삼보〉에서〈발원이〉는 관습적으로 염불로 외우지만 괄호 안에 넣어야 할 대목입니다. 그 뜻은 '발원을 마치고 삼보께 귀의하여 예배 드리옵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번째의〈나무상주시방불〉은 '시방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가 되고
두번째의〈나무상주시방법〉은 '시방에 항상 있는 법에 귀의하며 받드옵니다'가 되며,
세번째의〈나무상주시방승〉은 '시방에 항상 계시는 승가에 귀의하며 받드옵니다'가 됩니다.
여기서〈상주〉라는 뜻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부처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도처에 항상 부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가까이는 가족 부처님, 이웃 부처님에서부터 멀리는 온 인류가 모두 부처님이라는 차원에서 귀의하고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法)또한 특정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열고 보면 곳곳에 스승이 있고 곳곳에 배울 것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사 속에 불법은 낱낱이 있는 것입니다.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3번)
여기서부터는 불공을 올릴 때만 외우는 부분으로〈정삼업진언〉은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입니다. 진언의 내용을 풀이해 보면,〈옴〉의 해석은 생략하기로 하고, 〈사바바바〉는 '본성(本性)'이라는 뜻입니다. 〈수다〉는 '청정(淸淨)'이라는 뜻이며,〈살바〉는 '일체'의 뜻이 있습니다. 〈달마〉는 '법(法)'이라는 뜻이며,〈수도〉는〈수다〉와 같은 것으로 '본성, 자성'이라는 뜻이며,〈함〉은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을 붙여서 뜻이 통하도록 해석해 보면, '옴! 본성이 청정한 일체법이여, 내 자성도 청정하여지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 모든 법은 본성이 원래 청정하고 훌륭한 것이므로 자신 또한 이 법과 더불어 함께 청정하게 되며, 그렇게 될 때 삼업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단진언(開壇眞言)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3번)
〈개단진언〉은 말 그대로 '제단을 여는 진언'입니다. 진언을 풀이해 보면,〈바아라〉는 '금강(金剛)'의 뜻이며, 〈놔라〉는 '문(門)'의 뜻이며, 〈다가다야〉는 '열다'의 뜻입니다. 〈삼마야〉는 '삼매'의 뜻이고,〈바라베 사야〉는 '두루 들어가다'의 뜻이며, 〈훔〉은 '이구청정(離垢靑淨)'의 뜻입니다. 그래서〈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 사야훔〉을 연결해서 풀이해 보면, '옴! 금강의 문이여, 열어지이다. 삼매에 두루 들어가라'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법당에 들어가기 위해 법당문을 열었다고 하면 법당의 분위기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단진언(建壇眞言)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3번)
〈건단진언〉은 '제단을 세우는 진언'으로 진언을 풀이해 보면, 〈난다〉는 '환희의 신(神)'이라는 뜻이며,〈나지〉는 '건단무녀신'의 뜻이고, 〈바리〉는 '가지고 오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는 '환희신이여, 환희신이여, 단을 세우는 무녀신이여, 희열의 낙원을 가지고 오소서, 그 일이 성취되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단을 세워서 부처님과 보살들을 청해서 의식을 집행하려고 하니 기쁨과 환희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여피계명주(如彼계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衆罪除)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3번)
〈정법계진언〉은 앞에서 한번 나온 것으로 여기서는 주위를 다시 한번 청정하게 하는 의미에서 반복의 형식을 취한 것입니다. 그 풀이도 앞의〈옴 남〉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원래는〈옴 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첫째, 둘째 구절인〈라자색선백, 공점이엄지〉는 '〈라〉의 글자는 색이 곱고 흰데, 공의 점으로써 장엄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넷째 구절인〈여피계명주, 치지어정상〉은 '글자 모양은 마치 상투 위에 둥근 구슬을 올린 것과 같으며 그것을 정상에 두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구절은 범서의 글자 모양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섯째, 여섯째 구절인〈진언동법계, 무량중죄제〉는 '정법계 진언은 법계와 같은데 그 진언은 한량없는 죄를 소멸케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일곱째, 여덟째 구절인〈일체촉예처, 당가차자문〉은 '일체의 더러운 곳에 닿을 때마다 마땅히 이 글자〈옴 남〉를 놓아 두라'는 뜻이 됩니다.
끝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구절인〈나무 사만다 못다남〉은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께 귀의하며 받으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맨 끝의〈남〉은 보리문(菩提門)인 '불의 종자'라는 뜻입니다.
이상으로 『천수경』의 해설을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천수경』은 짧다면 짧은 경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짧지가 않습니다. 『천수경』의 결론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어둠과 두려움과 부정적인 것이 전부 사라져 늘 기쁨과 희망과 안녕과 평화가 내려지도록 함에 있습니다.
단순히 경전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속에 숨은 뜻이 우리의 인생사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삶에 유익한 보탬이 되어야겠습니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자비 사상을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란 우리들이 마음속에 본래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뜻합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얼굴 역시 우리들의 본래의 얼굴이고 모든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우리가『천수경』을 통해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나 관세음보살의 기도를 하는 뜻은 우리들의 본래 모습인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관세음보살과 같은 아름답고 자비로운 얼굴을 나투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름다운 얼굴을 통해서 표현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마음씀씀이여야 할 것입니다. 『천수경』을 통해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천수경』을 공부한 이 인연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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