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가지 서원
그럼 지금부터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면서 열 가지 서원을 말하는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智慧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善方便)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乘般若船)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越苦海)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足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登圓寂山)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이상은 불교인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표현한 열 가지 큰 원으로서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갖고 있으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구성상으로 보면 먼저 '속(速)'자가 나오고 다음으로 조(早)'자가 연결되어 계속 반복되어 있는데 그 뜻은 같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그럼 먼저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나무대비관세음〉이란 뜻을 새겨 보면,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하여 받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나무〉라는 것은 단순히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귀의하여 받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아속지일체법
귀의하여 받는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첫 번째 원은〈원아속지일체법〉인데 그 뜻은 '원컨대 내가 일체의 모든 법을 빨리 알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 중에서도 법의 세계는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법〉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이르는 말로써 불교를 믿고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첫째 조건이 바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아조득지혜안
이렇게 법을 알고 난 다음에라야 둘째의 원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원아조득지혜안〉입니다. 그 뜻은 '원컨대 내가 지혜의 눈을 빨리 뜨 게 해 주십시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과 고통도 지혜의 눈을 뜨고 보면 어둠이 걷히듯 사라지는 것입니다. 흔히 불교를자비의 종교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불교는 자비보다 지혜가 우선하는 종교입니다. 지혜가 앞서지 않으면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치우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자식 간에도 자녀 중심으로 해야할 일을 부모의 욕심이 중심이 되어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결국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받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그가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그에게 이로운가를 바로 보는 지혜의 안목이 앞서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거듭 지혜를 강조하셨고 지혜가 선행된 자비를 행해야 비록소 그 지비도 올바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로서 지식과 지혜는 엄밀히 구별해야 합니다. 지식이 단순한 알음알이라면 지혜는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공부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라면 누구나 지혜의 눈을 뜨는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을 알고 지혜의 눈을 뜬 자는 어떠한 곤경이나 어려움, 불행에 처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그 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원아속도일체중
세 번째 원으로〈원아속도일체중〉은 '원컨대 내가 모든 사람들을 빨리 제도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제도한다는 것은 모든 고난, 어려움, 불행등의 문젯거리를 해결해 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생의 궁극 목표가 생사해탈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잡다한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 제도인 것입니다.
원아조극선방편
네 번째 원으로 〈원아조극선방편〉은 '원컨대 내가 좋은 방편을 빨리 얻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방편〉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그 방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악행이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많은 방편을 쓰셨는데, 방편을 비유한 말로써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았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아무리 좋고 그것이 즐거운 일일지라도 뗏목을 탔으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주위에서 불교에 입문하여도 강을 건널 생각은 않고 그저 뗏목만 타고 주저앉아 강놀이만 즐기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의 진보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불법과 인연을 맺어서 부처님과 같은 높은 인격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면 방편에 얽매이지 말고 강을 건넜으면 미련 없이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그 뗏목에 해당하는 방편이 무엇인지 살필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며, 방편 중에서도 좋은 방편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배를 탄 목적은 건너편 언덕에 다다르는 것인데, 해가 저물었다고 해서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아속승반야선
다음으로 다섯 번째 원에 해당하는 〈원아속승반야선〉은 '원컨대 내가 반야의 배를 빨리 타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반야〉는 지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데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투철한 안목이 담겨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십구재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해서 조그맣게 종이로 배를 만들어 달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미신적인 것을 왜 하느냐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식을 통해 업장이 소멸되고 참으로 지혜의 배를 타고 저 언덕을 건너가는 눈을 떠는 계기가 되고자 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사에 참여할 때 의식 속에 담긴 의미를 바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원아조득월고해
여섯 번째 원으로〈원아조득월고해〉는 '원컨대 내가 괴로움의 바다를 빨리 건너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고(苦)〉라고 할 때 사고팔고(死苦八苦)를 말하지만 여기서 괴로움의 바다는 곧 문제의식을 말합니다. 요즈음은 누구나 수많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가까이는 자신의 문제, 가정, 사회, 나아가서 세계 전체를 두고 볼 때 도처에 문젯거리가 산적해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결국〈고〉인 것입니다.이러한 모든 고통을 해결하여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라는 열쇠로 풀어야 합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배를 타고〈고〉를 건너간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아속득계정도
일곱 번째 원은〈원아속득계정도〉인데 그 뜻은 '원컨대 내가 계와 정의 길을 빨리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계(戒)〉라고 하면 오계, 십계 등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윤리와 도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계의 진정한 뜻입니다. 흔히 계의 뜻을 잘못 받아들여 경전에 적힌 제목에 너무 얽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 될 것을 문제 삼아서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계〉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마음의 안정인〈정(定)〉의 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략되었지만〈정〉이 이루어지면 그다음 단계로 가장 높은 경지인 〈혜(慧), 즉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계. 정. 혜, 이 셋을 합하여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공부의 아주 중요한 과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원아조등원적산
여덟 번째 원은〈원아조등원적산〉인데 그것은 '원컨대 내가 원만하고 고요한 산에 빨리 오르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원적산〉은 철저히 고요해진 자리, 즉 열반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갖 무명과 어둠, 탐. 진. 치 삼독 등이 완전히 뿌리 뽑혀서 소멸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지혜로 이어져 번뇌가 사라진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열반의 경지인 것입니다.
원아속회무위사
아홉 번째 원으로〈원아속회무위사〉는 '원컨대 내가 아무것도 함이 없는 집에 빨리 모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위사〉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했다는 마음의 흔적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마음이 철저히 고요해지면 행함이 있어도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원아조동법성신
끝으로 열 번째 원은〈원아조동법성신〉인데 그 뜻은 '원컨대 내가 법성의 몸과 같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법성〉 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아조동법성신〉은 앞의 아홉 가지 단계의 원을 모두 성취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자기 자신이 진리화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진리화가 된다고 해서 몸을 바꾸어 이상한 몸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그 자체가 진리 덩어리이므로 그 자체로서 진리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란 거짓 껍데기로 얼룩져있는 것을 말끔히 벗어버리고 본래의 진리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인 것임을 깨닫는 일이며, 그 것을 믿는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에서 시작하여 부처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처란 바로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본래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비록 구름에 가려 있다고 해도 태양으로서의 가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위대한 생명은 아무리 거짓 껍데기에 덮여 있어도 변함이 없는 것이며,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자기 자신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 보다 더 존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의 몸이라는 사실은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컵에 물을 부으면 컵의 모양대로 형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의 물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을 담는 그릇 모양은 우리가 지은 업대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업의 모습대로 우리의〈법성신〉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모양이나 형상에 우리는 속아서 거기에 매달려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불성은 한정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아무 걸림이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해탈이 가능하고 불생불멸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 자성(自性)은 태어남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러한 근본정신이 철저히 바탕에 갈려 있어야 합니다. 그 정신이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 그것은 곧 자성자리를 찾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모든 문제를 다 열 수 있고, 다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몸이 흙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서원 중에서 맨 마지막인 〈원아조동법성신>의 의미를 통해 금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이 흙덩어리인 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금덩어리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이 중생노릇만 거듭 되풀이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열 가지 서원에 이어 다음에 나오는 것은 서원의 극치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지옥의 모습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我若向刀山 刀山自催折)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我若向火湯 火湯自消滅)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 (我若向地獄 地獄自枯渴)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 (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맨 처음에 나오는〈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만약 칼산을 향해 나아간다면 칼산은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칼산'은 험난한 인생역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역경을 만납니다. 칼산 보다 더한 마음의 불행, 피와 눈물의 능선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산을 딛는 아픔보다 더욱 쓰라린 인생의 체험을 누구나 다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만났을 때 그 칼산은 저절로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법성신(法性身)〉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자기 자신이 진짜 금덩어리임을 알았을 때 우리의 본성은 허망한 육신이 아니라 참다운 생명이 육신 속에 존재함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대로 불성(佛性) 임을 이해한다면 그 어떤 삶의 고난도, 어려움도 그 앞에서는 다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참으로 귀중한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은 부처님의 생명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공덕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자비는 부처님의 대자대비함과 조금도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실상이 곧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설사 칼산과 같은 불행을 만나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이미 칼산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귀중함과 보배로움이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면 불행은 이미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의 태양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몇 조각 있다고 해도 태양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방해의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래면목은 태양처럼 밝고 한량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존재라고 인정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확신에 찬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다른 어떤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발견과 믿음이 불교의 생명이며, 불교를 믿는 중요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계속해서〈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을 풀이하면 '내가 만약 화탕의 지옥을 향해 나아간다면 화탕지옥이 저절로 소멸된다'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자기 자신의〈법성신〉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 사람에게는 화탕의 지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탕지옥은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구름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태양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해 잇는 부처님의 생명을 우리의 삶에서 바로 저 태양과 구름과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
다음으로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만약 지옥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지옥이 저절로 말라서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아약항아귀 아귀자포만
계속이어지는 〈아약항아귀 아귀자포만〉은
'내가 만약 아귀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굶주린 아귀가 저절로 배가 불러진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약항수라 악심자조복
또〈아약항수라, 악심자조복〉은
'내가 만약 아수라와 같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면 악한 마음은 저절로 항복받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아약항축생 자득대지혜
끝으로〈아약항축생, 자득대지혜〉를 풀이하면 '내가 만약 축생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면 축생이 스스로 큰 지혜를 얻게 된다'가 됩니다. 여기서 축생이라고 하는 것은 축생보다도 못한 짓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축생이라고 해서 개나 돼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축생 보다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인간 생활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성 있는 불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외우더라도 입술 위에서 그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음미하면서 새겨 읽어야 새롭게 우리의 가슴에 와닿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이 부처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불이 끝나고 읽는 행선축원에도 이와 유사한 간절한 서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아명자 면삼도(聞我名者 免三道) 견아형자 득해탈(見我形者 得解脫)'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새겨보면 '내 이름만 들어도 지옥, 아귀, 축생의 삼도가 면해지고, 내 형상을 보기만 하여도 해탈을 얻는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지극한 서원인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은 성인이 만든 것이므로 서원도 보통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 표현들은 그것이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는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믿음이 소흘 해지기 쉽고 너무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고 아는 것을 소홀히 해도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지식을 조심스럽게 보강하면서 서로 조화롭게 해야만 올바른 신행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부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써 진정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다른 이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다른 이름
나무관세음 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나무대세지 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나무천수 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訶薩)
나무여의륜 보살마하살(南無如意輪菩薩摩訶薩)
나무관자재 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나무정취 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訶薩)
나무만월 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訶薩)
나무수월 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訶薩)
나무군다리 보살마하살(南無軍茶利菩薩摩訶薩)
나무십일면 보살마하살(南無十一面菩薩摩訶薩)
나무제대 보살마하살(南無諸大菩薩摩訶薩)
「나무본사 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3번)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흔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경우와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가능한 것처럼 관세음보살도 능력과 자비와 복력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맨 앞에 나오는 관세음보살과 두 번째의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좌우보처의 관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앞에 나온 모든 이름을 몽뚱그려서 〈제대보살마하살〉에게 귀의하고, 맨 끝으로 근본 되는 스승이신 아미타불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의 뿌리는 아미타불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보살〉이란 용어의 의미를 잠깐 되새겨 볼 필요 가 있습니다.
보살의 원래 이름은 '보리살타(菩提薩陀)'인데 줄여서 그냥〈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은 각유정(覺有情)이라고 해서 깨달은 분으로서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지향하는 대승불교의 대표되는 이름입니다. 위로는 부처님처럼 되고자 하지만 아래로는 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웃을 돌보아야 한다는 두 가지 마음을 갖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습상 흔히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는데 대승의 입장에서 볼 때 승속을 막론하고 불자 전체를 이르는 말이므로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보살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수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을 도와주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이런 보살의 의미에 충실해야 합니다. 눈을 잘 뜨고 보면 도처에 보살이 행해야 할 일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는 심음으로서 거둬들이고 베풂으로서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공덕을 닦고 실천하는 보살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또〈마하살〉이란 '대보살'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공덕과 지혜를 쌓아 대보살의 경지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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