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란
여름 3개월과 겨울 3개월 동안 출가한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불교제도. 불교수행법.
안거의 사전적 의미
안거는 범어 'varṣa'의 한역으로 불교의 수행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한 곳에 모여서 수행하는 기간을 말한다.
안거의 기원
하안거는 고대 인도의 장마철과 관련해 생겨난 수행문화이다. 인도에서는 여름 몬순기에 접어들면 많은 비가 내려, 수행자들은 석 달간 승원이나 동굴 등에 머물며 수행에만 전념했다. 폭우로 인해 탁발을 나가기도 힘들 뿐더러, 우기에는 벌레들이 땅위로 나와 활동하므로 이때 바깥출입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생명을 밟아 살생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안거를 의미하는 ‘바르시카(varsika)’라는 말도 우기(雨期)라는 뜻을 지녔다. 인도에서는 바라문교주3에서 안거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비구(比丘)들이 여름에 행각주4하다가 폭풍우를 만나고 초목과 벌레들을 살상하여 비난을 받았으므로 여름에는 외출을 금지하고 수행을 하게 한 것이 불교 안거의 기원이다. 즉, 살생을 멈추기 위해 안거가 시작이 되었다.
탁발걸식에 의지하던 수행자들이 바깥출입을 금하고 한곳에 정주하면 재가신도나 승원에서는 그들에게 수행처와 음식을 제공하게 된다. <사분율>에 부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비구들이여, 적당한 곳을 골라 미리 말하고 안거하라. 수행에 장애되는 일이 있으면 곧 떠나라. 안거를 약속하고 지키지 않거나, 안거 중 까닭 없이 떠나거나 대중화합을 깨거나 허락된 출타기간을 넘기면 법랍으로 인정하지 않느니라.” 이처럼 부처님 재세 시에도 안거로써 수행에 전념케 하고 이를 근간으로 법랍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안거의 원래 뜻
안거의 원래 뜻은 우기(雨期)를 뜻하고, 이러한 우기에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불제자가 한곳에 모여 조용히 도심(道心)주5을 일으켜 수행하게 된다.
하안거와 동안거의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結制)주8하여 7월 15일 해제(解制)주9하는 안거제도를 따른다.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하여 다음해 1월 15일에 해제하여 행하고 있다. 그리고 안거기간 동안은 한곳에서만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며, 몇 안거를 났느냐 함이 곧 승려의 수행이력이 되기도 한다.
남방불교주1에서는 여름 한 차례만 안거를 행하며, 북방불교주2에서는 여름 3개월 동안 행하는 하안거(夏安居)와 겨울 3개월 동안 행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있다. 즉 1년에 두 번 안거를 행하게 된다.
좌선 위주의 수행
안거는 각 본산의 사찰별로 행하며, 안거를 실시하는 사원은 안거자 명단을 작성하고, 안거 중의 각 소임을 정한다. 안거 중에는 좌선 · 간경(看經)주10 등에 의하여 수행을 행하는 것이 관례이나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좌선 위주로 수행한다. 안거를 마치고 해제하는 날은 대중공양(大衆供養)주11 등을 베풀어 그 동안의 노고를 달래는 풍습이 있다. 특히 7월 15일의 해제하는 날에는 우란분재(盂蘭盆齋)주12 등을 거행한다.
결제(結制)·해제(解制)
안거를 행하고 마치는 것을 맺고 푼다는 뜻으로 새겨 각각 결제(結制)·해제(解制)라 한다. <사분율>에서는 안거를 마치면서 해야 할 일로 ‘자자를 행하고, 경계를 풀고, 경계를 맺고, 공덕의(功德衣)를 받는 것‘의 네 가지를 들었다. 자자(自恣)는 안거가 끝나는 날 수행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허물을 지적해주는 참회법이다. 경계를 풀고 다시 맺음은, 안거에 모인 승가를 해산하고, 일정구역 중심의 공간적 경계로서 새 승가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공덕의는 재가자들이 해제한 스님들에게 가사를 공양하는 것으로, 용맹정진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안거의 제도화
우리나라에서도 안거의 제도화와 무관하게 여름과 겨울의 안거 철에는 스님들이 두문불출하고 수행에 힘썼다. 고려후기 태고보우스님의 법어집인 <태고화상어록>에 “도를 닦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 있어서 동안거 결제를 청했다”는 대목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선당(禪堂), 서쪽에 승당(僧堂)을 두는 사찰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화된 수선안거(修禪安居)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진 것이다.
억불의 조선 초기에도 이러한 선풍은 끊이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21년에 신하들이 “하안거에 든 승려들에게 백성이 다투어 공양한다”며 이를 금하도록 상소를 올린 기록들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승려도 나의 백성이라 절에서 살면서 아니 먹을 수는 없을 터, 그들이 굶주린다면 나라에서 모른 척 하겠느냐. 그러니 민중이 다투어 공양함은 해로울 것이 없다.” 수행에 힘쓰는 스님을 공경하며 공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명쾌한 답변이다.
〈육조단경〉의 좌선이란?
선종(禪宗)의 종전 〈육조단경〉에서는 ‘좌선(坐禪)’을 이렇게 말한다.
“좌선이란 무엇인가? 일체 걸림이 없어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6조 혜능대사가 말한 좌선은 앉는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 안과 밖으로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어 버린다. 참선하면 앉아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하는 좌선을 떠올리는 우리의 고정 관념을 부수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그러니 좌선은 앉은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육조단경〉의 선정이란?
육조는 좌선을 말하고 이어서 선정을 말한다.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만약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정하다.”
육조 대사는 좌선과 선정을 같은 뜻으로 말한다. 우리는 좌선이라는 말에 집착하여 좌선을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라 오해하는데, 실제 좌선의 참 뜻은 선정으로, 밖으로 경계에 머물지 않고 안으로 안정된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스스로 정하다”는 말씀이다. 좌선과 선정은 본래 청정하고 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본래 청정, 본래 성불, 본래 부처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좌선해서 선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선정이 갖춰져 있으니 오염된 번뇌망상만 비우면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참선을 바르게 잘 하려면 이 ‘좌선’의 참 뜻을 바로 알아 정견을 갖춰야 한다.
진정한 좌선이란
좌선은 일상생활서 중도지혜를 밝힘
육조가 말하는 좌선은 마음이 밖으로 물질이나 모양에 집착하여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안정됨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좋은 집, 좋은 차, 보물이나 많은 재산에 집착하여 밖으로 밖으로 부귀영화를 쫓고 행복을 찾는다.
육조가 말하는 좌선은 곧 바른 행복의 길을 말한다. 즉 마음 밖으로 물질과 재산을 추구하는 끝없는 욕망을 멈추고 내 마음 안에서 찾는 행복을 말한다. 이것을 비움의 행복이라 하겠다. 내 안에 물질을 향한 끝없는 집착과 갈망을 비우고 비워 본래 다 갖춰진 마음을 밝히는 것이 참선이고 좌선이다.
부처님은 마음을 깨치고는 밖으로 물질에 집착을 멈추고 안으로는 늘 안정되어 평생 무소유로 흔들림 없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셨다. 6조 조계 혜능 대사 역시 ‘소욕지족(少欲知足)’을 말씀하셨다. 적은 욕심에 만족을 알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참선을 좌선으로만 보는 견해가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참선, 또는 앉아서 하는 좌선은 앉는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 안팎으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선, 좌선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좋다-나쁘다, 많다-적다, 물질-비물질 등의 분별망상을 비우고 일상생활에서 중도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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