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문
높아서 가히 우러러 보지 못함은 수행을 쌓은 보살도 뺨의 비늘을 용문에 쬐는 것이요,
깊어서 가히 엿보지 못함은 덕이 높은 성문도 보고 듣는 것이 아름다운 법회에 막혔도다.
보고 듣는 것이 종자가 됨이라 팔난에서도 십지의 단계를 넘어가고,
이해와 실천이 몸에 있음이라 일생에 광겁의 불과를 원만했도다.
부처님의 사자분신삼매에 대중들은 서다림에서 다 증득하고,
코끼리가 몸을 돌림에 육천 비구가 언하에 도를 이뤘도다.
복성동쪽 대탑묘처에서 열어 밝히니 지혜가 가득함이 초심과 다르지 않고,
지위에 의지하여 남쪽으로 구함에 인행이 원만함이 모공을 넘지 아니했도다.
미진과 같은 경전을 쪼갬에 순간순간에 불과(佛果)를 이루고
중생의 서원을 다함에 먼지 먼지마다 수행이 가득하도다.
若夫高不可仰은 則積行菩薩도 曝腮鱗於龍門이오
약부불가앙 즉적행보살 폭시린어용문
深不可闚는 則上德聲聞도 杜視聽於嘉會로다
심불가규 즉상덕성문 두시청어가회
見聞爲種이라 八難에 超十地之階하고
견문위종 팔난 초십지지계
解行在躬이라 一生에 圓曠劫之果로다
해행재궁 일생 원광겁지과
獅子奮迅에 衆海가 頓證於林中이오
사자분신 중해 돈증어림중
象王廻旋에 六千이 道成於言下로다
상왕회선 육천 도성어언하
啓明東廟에 智滿이 不異於初心이요
계명동묘 지만 불이어초심
寄位南求에 因圓이 不踰於毛孔이로다
기위남구 인원 불유어모공
剖微塵之經卷에 則念念果成이요
부미진지경권 즉념념과성
盡衆生之願門에 則塵塵行滿이로다
진중생지원문 즉진진행만
제7門, 이익을 이룸에 한꺼번에 뛰어넘다[成益頓超]
<1> 初二 總顯高深 權小莫測
若夫高不可仰은 則積行菩薩도 曝腮鱗於龍門이오
높아서 가히 우러러 보지 못함은 수행을 쌓은 보살도 뺨의 비늘을 용문에 쬐는 것이요,
深不可闚는 則上德聲聞도 杜視聽於嘉會로다
깊어서 가히 엿보지 못함은 덕이 높은 성문도 보고 듣는 것이 아름다운 법회에 막혔도다.
<2>後八 正明成益 遍益頓圓
見聞爲種이라 八難에 超十地之階하고
보고 듣는 것이 종자가 됨이라 팔난에서도 십지의 단계를 넘어가고,
解行在躬이라 一生에 圓曠劫之果로다
이해와 실천이 몸에 있음이라 일생에 광겁의 불과를 원만했도다.
獅子奮迅에 衆海가 頓證於林中이오
부처님의 사자분신삼매에 대중들은 서다림에서 다 증득하고,
象王廻旋에 六千이 道成於言下로다
코끼리가 몸을 돌림에 육천 비구가 언하에 도를 이뤘도다.
啓明東廟에 智滿이 不異於初心이요
복성동쪽 대탑묘처에서 열어 밝히니 지혜가 가득함이 초심과 다르지 않고,
寄位南求에 因圓이 不踰於毛孔이로다
지위에 의지하여 남쪽으로 구함에 인행이 원만함이 모공을 넘지 아니했도다.
剖微塵之經卷에 則念念果成이요
미진과 같은 경전을 쪼갬에 순간순간에 불과를 이루고
盡衆生之願門에 則塵塵行滿이로다
중생의 서원을 다함에 먼지 먼지마다 수행이 가득하도다.
제7門, 成益頓超 이익을 이룸에 한꺼번에 뛰어넘다
성익돈초(成益頓超) :
이익을 이룸에 한꺼번에 뛰어나다.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이익을 이루기 위함이다. 정신적인 이익이 됐든 물질적인 이익이 됐든 우리가 바라는 바 그 어떤 이익이 됐든간에 이 화엄경 도리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다 이루어진다.
몰록 돈(頓)자, 뛰어날 초(超)자. 이익을 이루는데 한꺼번에 된다. 보통 사람들이 한 달에 월급을 백만원, 이백만원, 삼백만원 받아서 반은 생활비로 쓰고 반은 교육비 내고 세금 내고 뭐하고 해서 나머지 한 십분의 일쯤 저금하면 얼마나 되겠는가. 꼬깃꼬깃 그렇게 모아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사다.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몰록 뛰어나 한꺼번에 다 성취하는 성익돈초가 못된다.
그런데 화엄경의 도리를 잘 공부해서 한 순간에 마음의 보고에 눈을 뜨면 그 이익이 한꺼번에 다 되는 도리를 알게 된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 자신 속에 다 내재되어 있다. 본래로 가지고 있는 이익, 공덕, 능력에 눈만 뜨면 된다. 그것을 아는 순간 전부 내 것이다.
하나 하나 몇십 년 모아서 덕을 이루고 돈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되는 도리다.
마치 천 년 만 년 된 동굴에 전기를 가설해서 전기스위치를 싹 올리면 그 동굴이 한꺼번에 환하게 비춰지는 것과 같다. 더구나 그 동굴 속에는 황금보화가 가득히 차 있다.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우리가 제대로 깊이 있게 이해를 못해서 그렇지 화엄경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법희선열을 맛볼 수 있는 경전이다.
지금까지 화엄경 전반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제7문부터는 입법계품 이야기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라고 하는 평범한 젊은이가 발심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이다. 53선지식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는 선재동자는 모든 불자의 모델이다. 청량스님은 이 서문에서 입법계품 내용을 뼈대만 추려서 간략하게 소개한다.
<1> 初二 總顯高深 權小莫測
若夫高不可仰은 則積行菩薩도 曝腮鱗於龍門이오
높아서 가히 우러러 보지 못함은 수행을 쌓은 보살도 뺨의
비늘을 용문에 쬐는 것이요,
深不可闚는 則上德聲聞도 杜視聽於嘉會로다
깊어서 가히 엿보지 못함은 덕이 높은 성문도 보고 듣는 것이 아름다운 법회에 막혔도다.
*
초이(初二) 총현고심(總顯高深) 권소막측(權小莫測): 처음 두 문장은 화엄경은 이익과 공덕이 높고 깊은 것을 모두 다 나타내고 권교보살이나 권교소승이나 이런 이들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권(權)은 방편이다. 저울대 권(權)자인데, 저울대는 달고자 하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서 늘 평형을 이룬다. 한근짜리를 달아도 평형을 이루고, 반 근짜리를 달아도 저울추가 왔다 갔다 하면서 항상 평형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방편은 근기에 따라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그 수준에 맞게 이야기 한다. 유치원생을 만나면 유치원생에게 맞게 이야기하고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 수준에 맞게 이야기하며 중학생을 만나면 중학생 수준에 맞게 이야기 한다.
방편이란 마치 저울처럼 모든 사람의 근기에 맞게 하기 때문에 방편을 말할 때 이 권자를 쓴다.
소(小)자는 소승(小乘)이라는 뜻이다. 그런 방편이라야 이해하는 소승들에게는 이 화엄경이 측량하기 어렵다. 소승은 화엄경을 측량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소승적인 생각, 좁은 생각을 가진 마음으로서는 화엄경이 측량이 안된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해왔듯이 화엄경은 공부해보면 뭔가 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어안이 벙벙하다. ‘어디 가서 복을 지으면 복 지은 만치 과보를 얻어 온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보고 하는 소리인지, 누구에게 해당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뭔가 거기에서 환희심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이 차츰차츰 화엄경의 세계에 젖어들게 된다. 그렇더라도 또 항상 소승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소승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화엄경의 그 높이와 깊이를 측량하지 못한다.
*
약부고불가앙(若夫高不可仰)은 :높아서 가히 우러러 보지 못함은. 화엄경의 경지가 다른 경전하고 비교했을 때 그 높이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높다.
약부(若夫)는 글을 쓰는데 필요한 수사 같은 것이다. 고(高)부터 해석을 해서 '높아서 가히 우러러보지 못함이다'라고 해석한다. 키가 큰 사람 옆에 있으면 쳐다보려니 목이 아픈 것과 마찬가지다. 화엄경의 이치는 너무 높아서 소승들은 쳐다볼 수가 없다.
즉적행보살(則積行菩薩)도 : 수행을 상당히 쌓았다는 보살도. 적행보살은 수행을 상당히 쌓은 보살들이다.
폭시린어용문(曝腮鱗於龍門)이요: 용문에 뺨을 슬쩍 비추기만 하고 더 이상은 뛰어 오르지 못하는 경지다. 용문은 등용문(登龍門)할 때의 용문이다. 전설에는 중국에 용문이라고 하는 높은 폭포가 있는데 미꾸라지가 그 용문을 통과하면 용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이무기가 된다고 한다.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하려면 용문을 뛰어 올라야 된다. 옛날 과거시험에 합격한다든지 요즘 고시공부를 해서 고시에 합격하는 것을 등용문에 올랐다고도 표현한다.
보살도 뛰어 올라야 부처가 되고 화엄경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맛볼 수가 있다. 그런데 폭시린어용문이란 다 뛰어오르지 못하고 뺨의 비늘을 용문에 쬐는 것으로 끝난다는 말이다. 폭(曝)은 쏘이다, 보여준다, 라는 뜻이고 시린(鰓鱗)은 아가미 시(鰓)자인데, 등용문에 아가미만 보여주고 올라가지는 못한다. 한껏 높이 뛰는데 자기는 힘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나중에는 물고기의 몸이 옆으로 간다.그래서 고기의 옆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형용한 것이 폭시린이다. 물고기가 아득한 폭포를 훌쩍 뛰어서 바라보고 시린을 보여주기만 하고 올라가지는 못하듯이 화엄경의 경지가 다른 경전과 비교하여 그토록 높아서 적행보살도 다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높은 차원에서의 화엄경이고 다음 문장은 깊은 차원에서의 화엄경을 이야기 한다.
*
심불가규(深不可闚)라 :깊고 깊어서 가히 엿보지 못하는 것은
즉상덕성문(則上德聲聞)도 :덕이 아주 높은 성문들. 여기는 사리불, 목건련, 수보리, 가섭, 아난과 같은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을 말한다. 그런 이들이 화엄경에 다 나오는데 그들은 덕이 높다. 그러한 상덕성문(上德聲聞)도
두시청어가회(杜視聽於嘉會)로다 : 보고 듣는 것이 가회(嘉會)에 막혔다. 두(杜) 막혔다. 시(視)와 청(聽)이, 보고 듣는 것이 가회(嘉會) 아름다울 가(嘉)자, 법회 회(會)자다.아름다운 법회라는 말이다.
높은 성문들도 아주 근사한 법회가 열린다는 소문만 들었지 그 법회의 주인공이 누군지 어떤 보살들이 모이는지 어떤 법문을 설하는지 그 깊은 도리는 도대체 모른다. 상덕성문이 그 자리에 참석했음에도 자기 안목이 부족하고 수준이 못 미치다 보니 아름다운 법회가 있다는 소리에 그만 꽉 막혀서 그것으로써 끝이다.
서울에는 이와 똑같은 글자를 쓰는 가회동이 있는데 내가 그전에 총무원에 근무할 때 직원들 사는 집이 있어서 가보니까 가회동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책을 하나 썼는데 서문을 쓰면서 ‘가회선실(嘉會禪室)’이라고 기록하였다.
가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법회인 화엄법회다. 그러니 가회동에서는 늘 화엄경이 설해져야 한다.
상덕성문들도 ‘화엄경 법회가 있단다’고 하는 소리만 들었고, 설사 화엄경 법회에 왔다 하더라도 그 법회가 있다는 사실만 보고 듣는데 꽉 막혀버리고 내용은 뭔지 모른다. 아까도 문수선원의 화엄법회에 왔다가 자기 볼 일만 보고 쑥 나가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야말로 ‘여기는 화엄경 법회하는 갑다’하는 것만 알지 화엄경법회의 속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문수선원에 아름다운 법회, 화엄법회가 열린단다’ 하는 소문만 듣고 거기에 막혀서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끝이다. 진수는 맛을 못본다.
‘내가 기어이 화엄경 이치를 맛보고 터득하고 말겠다’ 하고 꾸역꾸역 오는 근기만이 결국 화엄경을 자기 살림살이로 할 수가 있다.
사실 화엄경은 그런 정도다.
옛날부터 화엄경을 스님들이 전문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안이 벙벙하니까 보다보면 보통 마음가지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앞부분만 조금 보고는 그만 ‘이력 마쳤다’고 한다. 내가 근래에 한국불교에 50여년의 세월을 쭉 지켜봤지만, 제대로 한 자 한 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낱낱이 짚어가면서 그 맛을 보고 이해하려는 화엄법회가 이루어진 경우는 오직 여기 문수선원 뿐이다.
여기는 스님들이 2백명 이상 와서 공부를 하고 신도들도 한 2백명이 와서 1만일을 작정하고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공부하는 데를 못보았다. 그야말로 이 법회가 가회(嘉會)다.
화엄경을 청량국사께서 공부를 해보니까 정말 화엄경이 이러한 차원인 것이다. 그것을 시적으로 이렇게 멋있게 서문에 표현했다.
화엄경은 높아서 가히 우러러 볼 수가 없고 수행을 쌓은 보살들도 아가미를 용문에다 쏘이기만 하고 가히 엿볼 수 없다. 깊어서 가히 못보는 것은 덕이 높은 성문들도 보고 듣는 것을 그 내용은 모르고 아름다운 법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에 막혀버렸다.
<2>後八 正明成益 遍益頓圓
見聞爲種이라 八難에 超十地之階하고
보고 듣는 것이 종자가 됨이라 팔난에서도 십지의 단계를 넘어가고,
解行在躬이라 一生에 圓曠劫之果로다
이해와 실천이 몸에 있음이라 일생에 광겁의 불과를 원만했도다.
獅子奮迅에 衆海가 頓證於林中이오
부처님의 사자분신삼매에 대중들은 서다림에서 다 증득하고,
象王廻旋에 六千이 道成於言下로다
코끼리가 몸을 돌림에 육천 비구가 언하에 도를 이뤘도다.
啓明東廟에 智滿이 不異於初心이요
복성동쪽 대탑묘처에서 열어 밝히니 지혜가 가득함이 초심과 다르지 않고,
寄位南求에 因圓이 不踰於毛孔이로다
지위에 의지하여 남쪽으로 구함에 인행이 원만함이 모공을 넘지 아니했도다.
剖微塵之經卷에 則念念果成이요
미진과 같은 경전을 쪼갬에 순간순간에 불과를 이루고
盡衆生之願門에 則塵塵行滿이로다
중생의 서원을 다함에 먼지 먼지마다 수행이 가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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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팔(後八) 정명성익(正明成益) 변익돈원(遍益頓圓): 뒤에 여덟 문장은 바로 정히 이익 이루는 것을 밝혀서 돈원이라고 하는 이들에게까지도 두루두루 이익이 미침을 이야기 한다. 돈원(頓圓)이라고 하는 말은 수준이 높고 수행이 높은 돈교보살과 원교보살을 말한다. 수행이 깊어진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정도 되는 이들이다. 돈원에 상대되는 말은 앞에서 방편으로써 살아가는 소승을 지칭하는 말로 앞에서 권소(權小)라고 하였다.
화엄경이 높고 깊어서 덕이 높은 성문들도 화엄경의 이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 내용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 화엄경을 가까이하고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의 이익에 대해 말한다.
*
견문위종(見聞爲種)이라 : 보고 듣는 것이 종자가 된다.우리가 지금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지만, 법사인 나부터도 화엄경의 이치를 그렇게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봐도 마찬가지다. 자기 수행과 공부에 따라서 자꾸 그 이해가 깊어질 뿐이다.그렇다고 하더라도 또 전혀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여러분들은 불교에 들어와서 신행생활을 하고 있고,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해서 그 경험을 통해서 화엄경을 공부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화엄경의 한구절에라도 환희심이 날 것이다.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법회에 동참하고[見] 법문소리를 듣고[聞] 약찬게를 한 번 읽고 법성게를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종자가 된다. 위종(爲種)이다.
인연이력(因緣履歷)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스님들이 4,5년 동안 강원에서 공부하는 것을 제대로 다 소화를 못시키고 인연만 맺어도 그것이 아주 큰 종자가 된다고 하는 표현이다.또 이근공덕(耳根功德)이라는 말이 있듯이 화엄경은 보고 듣는 공덕이 대단하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졸면서 들어도 종자가 된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삼키는 것과 같다. 임자를 못 만난 다이아몬드가 우리 창자 속으로 들어가서 대변으로 똥통으로 거름더미로 논으로 밭으로 굴러다녀도 결국은 변색도 되지 않고, 값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화엄경을 보고 들은 인연은 그와 같다.
팔난(八難)에 : 팔난은 불법을 만나기 어려운 여덟 가지를 말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없는 여덟 가지 어려운 조건은 ⓛ지옥, ②아귀, ③축생이다. 우리는 귀 안멀고 눈 멀지 않았다고 하는 이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다. 또 ④장수천(長壽天)이라고 하는 오래 사는 세상에 태어나도 ‘우리가 수천수만 년을 살 텐데 불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다는 것이다. ⑤북울단월(北鬱單越), 울단월이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제일 풍요롭고 넉넉하고 호화롭게 사는 세계의 사람들도 불교 공부를 잘 안한다. 지금 우리사회로 치면 돈 많은 부자나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이 도 닦을 마음을 낸다고 하는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난한 사람이 불교 공부를 잘하고 신심이 있다.
⑥맹롱음아(盲聾瘖瘂)는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다. 요즘은 점자책도 있고 여러 가지 활동으로 포교를 하지만 이들 역시 불법 만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우선 눈이 열려있으니까 사찰을 보거나 관세음보살 같은 불상을 보면 신심이 난다.
문수선원 같은 데서 2백여 분의 스님들이 한 회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환히 보면 없던 신심도 저절로 난다.
불법을 만났을 때 복을 많이 짓고 공덕을 많이 닦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보다 더 좋은 인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행여 다음 생애에 불법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손실이다.
8난 중에 일곱 번째는 ⑦세지변총(世智辯聰)이다. 세속적인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다. 세속적인 꾀나 총명이 늘어서, 참되고 바른 진리의 말씀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며 종교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알량한 지식과 꾀로 이리 저리 꿰어 맞추어서 선(禪)도리, 화엄도리, 불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진정한 불법이 가슴에 들어가지 않으며 불법이 영혼의 밭에 심어지지 않는다.
머리 총명한 사람들이 그릇이 크고 덕이 있으면 큰 그릇이 되는데, 머리 영리하고 그릇이 작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잔재주나 부리고 사주관상이나 배워서 무당짓이나 하는 이들이 우리 스님들 중에도 있다. 처음 강원에서 공부할 때 보면 머리가 아주 파딱파딱 잘 돌아가고 공부를 잘 하는 것 같은데 오래 가지 못한다. 기껏해야 사주나 관상이나 배워서 무당짓이나 하고 잡기에 능하다. 머리가 잘 돌아가기 때문에 잡기에 능하지만 거기에 휘말리다보면 제대로 깊이 있는 마음공부가 안된다.
마지막으로 ⑧불전불후(佛前佛後)라고 해서 불교가 없을 때 태어나거나 불교가 이 땅에서 사라졌을 때 태어나면 불교를 못 만난다. 이것을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라고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이다. 불전불후는 불교가 성한 시대가 아닌 때를 말한다.
다른 조건은 다 갖춰도 불교가 없다면 불교와 인연 맺을 길이 없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불법이 살아있다면 오히려 후대일수록 공부할 것이 훨씬 많다. 우리는 달마스님 이후에 태어났으니까 달마스님을 안다. 육조스님 이후에 태어났으니까 육조스님을 안다. 사실 늦게 태어난 것이 이렇게 홍복이다.
초십지지계(超十地之階)하고 : 팔난이라고 하는 여덟 가지 불법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손 치더라도 십지보살(十地菩薩)의 단계를 뛰어넘는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다음이 십지(十地)이다. 십주 십행 십회향을 삼현(三賢)이라고 해서 현인의 지위라고 하고 십지는 십성(十聖)이라고 해서 성인의 지위라고 한다.
팔난의 악조건에 있는 사람도 화엄경에 입문하고 제대로 인연만 맺으면 성인의 지위까지도 훌쩍 뛰어넘는다.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인 십지의 계단까지도 초월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 화엄산림에 동참해서 화엄경을 보고 듣고 약찬게를 외우고 법성게를 외우고 그나마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법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듣고 뭔가 아등바등 사경도 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한 시간 반 동안 앉아 있으면서 한 10분만 설사 이해가 되고 귀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큰 종자가 된다.
설사 여덟 가지 불법 만나기 어려운 조건을 갖췄다 하더라도 십지의 단계까지를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이 정명성익(正明成益)이다.
이익을 이루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고 돈교보살이나 원교보살까지도 두루두루 이익을 다 미친다고 하는 내용이다.
청량스님의 화엄경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이와 같이 투철하고 뛰어나다.
*
해행재궁(解行在躬)이라 : 해(解)와 행(行)이 내 몸에 있다.이해와 실천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해(解) 이해이고 행(行)은 실천이다. 궁(躬)자는 몸 궁(躬)자다. 내 몸에 있다.
일생(一生)에 : 이 일생은 선재동자의 일생이다. 멀리 가지 않는 금생이다.
다음생까지 간다는 것도 방편으로 하는 소리다. 사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원광겁지과(圓曠劫之果)로다 : 불과를 다 이뤄 마쳤다. 이 한 생에 광겁의 결과를 원만히 성취했다는 말이다. 삼아승지겁이라고 하는 길고 긴 세월동안 닦아서 이뤄야 할 결과를 금생에 원만성취(圓滿成就)했다. 원(圓)자는 원만성취했다는 뜻이다.
화엄경의 이치는 그렇다.
열심히 닦아서 복을 짓고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나게 하고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불교가 많다. 불교 안에도 그런 이론이 많은데 다음생으로 미루면 누가 책임도 못지니 편하긴 편하다. 그러나 불교의 바람직한 가르침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사실은 바로 오늘 끝나야 한다.
오늘 이 순간에서 부처가 되어야 한다.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는 일생(一生)이라고 했는데 일생을 금생, 한 생에, 오늘이라고 해석해도 좋다. 그 짧은 순간에 오랜 세월동안 닦아야 한다고 하는 결과를 원만성취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굽어 살펴보니 그 수준이 각양각색이었다. 부처님은 그러한 중생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별별 방편을 다 나열하였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워낙 방편이 많다.
삼아승지겁 동안 닦아야 부처를 이룬다는 말도 방편 속 이야기다.
화엄경은 그런 방편이 필요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의 선재동자는, 방편에서는 삼아승지겁이 지나야 이룰 수 있다고 한 불과를 일생동안에 다 이룬다.
*
사자분신(獅子奮迅)에 :화엄경에는 여러 가지 삼매를 보인다. 화엄삼매도 있고 해인삼매도 있다. 해인삼매가 중요한데 사자분신 역시 삼매의 이름이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다. 그래서 사자는 문수보살을 상징한다. 분신(奮迅)이라고 하는 말은 기지개 켜는 것이다.
사자가 멀리 달리려고 할 때 먼저 잠에서 깨어나 몸을 한 번 길게 뻗으면서 기지개를 크게 켠다. 그것이 말하자면 사자 스트레칭이다. 그렇게 해야 달리는 데 있어서 온갖 근육이라든지 뼈라든지 흐르는 피라든지 또 신경이라든지 이런 것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사자가 짐승을 잡기 위해서 힘을 모아서 한 번 용을 쓰며 몸을 확 뻗듯이 부처님의 모든 능력과 힘이 여기에 다 갈무리 된다. 화엄경은 문수보살의 지혜가 기지개를 펴서 비로소 이렇게 80권으로 설해진 것이다. 특히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러 다니는 구법행각의 처음에도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문수보살을 친견해서 지혜의 기지개를 펴고 그것을 통해서 지혜의 스트레칭을 완전하게 완벽히 하고 53선지식을 낱낱이 친견하는 방향으로 되어 있다.
지혜는 우리 인생을 완전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삶을 깨달음의 삶으로 만들어가는데 있어서 기지개를 펴는 준비운동과 같은 것이다. 사자의 준비운동, 지혜의 준비운동, 문수보살의 준비운동만 하더라도
중해(衆海)가 : 바다와 같이 많고 많은 대중들, 무수한 보살들이
돈증어림중(頓證於林中)이오 : 서다림[임중(林中)] 숲에서 한꺼번에 다 깨달아 버렸다. 화엄경의 소득을 이렇게 나열한다. 중해(衆海)라고 하는 것은 무수한 무량아승지겁 보살들을 말한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려고 출발하는데 무수한 보살들이 동참을 하고 한꺼번에 깨달아 버린다. 화엄경을 잘 보면 소득이 이렇게 많다.
화엄경의 안목으로는, 이 자리에 2백여 명 모였다고 해서 이 분들만 화엄경 대중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온 이들은 대표대중이고 그 대표대중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무수한 세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수십 억, 수백 억 세포가 개개인의 몸 속에 있고, 이 공간 속에도 유주무주(有住無住) 고혼(孤魂)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화엄회상 좋다’고 해서 온 고혼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약찬게를 읽었는데 약찬게에 나오는 화엄성중들이 당신들 이름을 불러준다고 다 와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좀 더 합리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그대로 이 세상 천지만물이다.우리 몸을 중심으로 해서 이 세상 천지만물이 그대로 화엄성중이다.
화엄경 약찬게 안에는 주주신중(主晝神衆), 주화신(主火神), 주풍신(主風神), 주공신(主空神)이 등장한다. 허공이라든지 바람이라든지 물이라든지 불이라든지 농사라든지 약이라든지 온갖 우리 생활 속에 필요한 존재들이 다 열거되어 있다. 그들이 세주묘엄품에 세상의 주인으로서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세상의 주인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한다.
우리 중에 손님은 아무도 없다. 전부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일 때 나 중심으로 남을 보면 그 사람이 손님이고 그 사람이 주인인 입장에서 보면 내가 손님이다. 주반중중(主伴重重)이다. 주인과 벗이 중중중중 중중하고 무진무진 무진하다. 내가 손님이 되기도 하고 내가 주인이 되기도 하고 서로 바꿔가면서 서로 상황 따라서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한 세계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깨닫고 설법한 것이 화엄경이다
이 많고 많은 대중이 숲 속에서 몰록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입법계품에 가면 나온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는데 많고 많은 대중이 몰록 화엄경의 이치를 깨달았다.
하나하나 깨닫는 것이 아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고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돈오돈수가 돈증(頓證)이다. 숲속에서 몰록 한꺼번에 깨닫는 것이다.
깨닫고 난 다음엔 어떻게 하는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53선지식을 친견하러 가는 것은 그 깨달음에 근거를 해서 그런 53선지식을 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 공부다. 공부 다하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 역시 공부한다. 그것이 공부한 사람의 삶이다. 공부를 많이 하면 더할 것이 있다. 불교공부를 우리가 해보니까 할수록 모르는 것은 더 많고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공부할거리가 더 많다.
이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그만치 살았는데 살일이 더 많다.
60 70살았다면 상당히 살았다.그런데 살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왜냐,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인생을 더 많이 알기 때문이다.‘내가 이제 이런 것을 알았는데 보다 더 공부를 더 해야지. 더 많이 해야지. 사경도 더 많이 하고 부처님 말씀도 더 공부해야지’하는 것이 우리의 그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어느 한계선까지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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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회선(象王廻旋)에 : 코끼리가 돌아보는 모습이 상왕회선이다. 코끼리는 체격이 크니까 아주 천천히 돌아본다. 상왕(象王)은 코끼리 왕이다. 보현보살이 항상 코끼리를 타고 있다. 보살들이 타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사자나 코끼리가 동물 중의 왕이고 으뜸이다.
그래서 사자라고도 표현 하고 코끼리라고도 표현한다.
화엄경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해서 설해져있지만 부처님을 또 달리 다른 어떤 모습으로 표현한다면 문수와 보현 두 보살로 표현한다.
문수는 지혜를 가지고 있고, 보현은 그 지혜를 실천과 행동으로 옮기는 보살이다.
그래서 사자(獅子)는 문수의 지혜요. 상왕(象王) 코끼리는 보현의 실천행이다.
입법계품에는 문수보살을 문수동자라고 표현하는데, 사리불이 6천 비구를 데리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도록 안내한다. 그러자 문수동자가 탄 코끼리가 아주 천천히 대중을 돌아보는 것이다. 코끼리가 회선(廻旋)한다고 하는 것은 스윽 돌아보는 것이다. 코끼리가 걸어가다가 몸을 돌려서 따라오는 새끼들, 따라오는 대중 코끼리 무리들이 제대로 따라오는가 하고 스윽 돌아보는 모습을 돌 회(廻)자, 돌 선(旋)자를 써서 회선이라고 한다.
육천(六千)이 도성어언하(道成於言下)로다 : 코끼리가 그렇게 한 번 돌아보는데 6천 명의 비구들이 한 마디 아래에 도를 이뤘더라.
마치 코끼리가 그 무리들을 인솔하고 가면서 무리가 제대로 따라오는가 하고 스윽 돌아보는 것처럼 보현보살이 대중을 돌아보는 모습이다.
보현보살의 그런 모습 하나에 육천 명의 대중들이, 여기 육천(六千)이라고 했는데 육천 명이 한 마디 말에 도를 이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입법계품 안에 소상하게 나와 있는 대목이다. 글이 참 좋다.
화엄경을 공부하면 이런 좋은 점도 있다. 우리가 입법계품까지 참고 공부하다 보면 이런 자세한 설명들을 경에서 다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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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동묘(啓明東廟)에 : 복성이라고 하는 성이 있는데 그 동쪽에 대탑묘처가 있다. 복성동쪽 대탑묘처에서 이 화엄의 도리를 열어 밝힌다.
앞에서부터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면서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는 내용이 소개가 되었었다. 계명(啓明)은 열어서 밝히다, 동묘(東廟)는 선재동자가 맨 처음 문수보살을 친견한 장소다. 80권 화엄경에는 62권부터 있는 내용이다.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려고 문수사리보살들에게 권해서 공부하도록 하는 내용이 맨 처음 거기에서 시작된다.
잠깐 읽어드리면 이런 구절이 있다.
‘이때 문수사리보살이 비구들을 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고는,
점점 남방으로 가면서 인간 세상을 지나다가 복성(福城)의 동쪽에 이르러
장엄당 사라숲[莊嚴幢娑羅林]에 머물렀으니 이곳은 옛적에 부처님들이 계시면서 중생을 교화하시던 큰 탑이 있는 곳이며, 세존께서도 과거에 보살의 행을 닦으시며 한량없이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시던 곳이다.’
동(東)이란 말은 복성 동쪽이란 말이고 묘(廟)라고 하는 말은 탑을 묘라고 한다.동쪽에 있는 대탑묘처에 머물렀다. 이때 문수사리동자가 장엄당 서다림의 대탑묘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수없이 많은 대중이 그 성에서 나와 그 처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이 화엄경 권제62에 나오는데 그런 내용을 여기에 압축해 놓은 것이다.
지만(智滿)이 : 지혜가 원만함이
불이어초심(不異於初心)이요 : 초심과 다르지 않다.
바로 첫 선지식을 만나자마자 지혜가 원만하다. 부처의 경지에 오른 그 지혜가 가득한데 그것은 처음 출발한 초심과 다르지 않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하였듯이 처음의 한 마음속에 불과의 지혜인 부처님의 지혜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청량스님은 이렇게 글도 아름답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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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지 표지에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그림이 차례로 나온다. 선재동자는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친견한다.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탁 튕기는 소리를 간단하게 낸다. 그렇게 소리 내는 간단하고 아주 작은 동작 하나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우리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고 고개 한 번 돌리고 기침 한 번 하고 한 번 웃고 하는 그 작은 표현도 사실은 그 뿌리, 근본자리는 온 우주가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온 우주의 근원이다. 나의 근원이고 이 세상의 근원이고 온 우주의 근원에서 그 동작이 기침 한 번으로도 나올 수가 있고 웃음 한 번으로도 표현될 수가 있다.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 역시 말할 것 없다.
그래서 옛날에 구지선사는 손가락 하나를 탁 세웠다.그 속에 다 포함된 것이다. 그 뿌리가 결국 이 우주의 뿌리다.온 삼라만상의 근본자리다. 거기에서 나온 동작이다.
우리 모두가 똑같다.그런데 그 손가락 한 번 튕기는데 선재동자는 그동안 52명의 선지식에게서 들어온 공부를 다 잊어버렸다. “내가 그동안 공부를 해온 거 다 잊어버렸다.”고 하니까, 미륵보살이“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 문수보살부터 다시 밟아와야 될 거 아니냐?”하였다.
손가락 한 번 탁 튕기는데 52명의 선지식으로부터 그동안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되냐? 그럼 처음부터 다시 가야될 거 아니냐? 그래서 선재동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탁 돌아선다. 선재동자도 대단하다.
여러분들이 일어서면 다 까먹는다 하는데 그것도 참 좋은 것이다. 좋은 공부도 까먹는데 좋지 아니한 것이야 오죽 하겠는가. 다 까먹어야 한다.
화엄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좋은 공부도 다 잊어버렸는데 좋지 아니한 악각(惡覺), 악습(惡習) 나쁜 소견들이야 남아있을 까닭이 있나?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다시 문수보살부터 친견하려고 돌아서는 그 순간, 저 멀리 1백 2십 성이라고 하는 그 많은 성 너머 수천 리나 되는 거리에서 문수보살이 있다가 손을 척 뻗어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선재 선재라”라고 한다. 선재선재란 말이 거기서 나온다. 선재선재라. 훌륭하고 훌륭하다 하면서 화엄경에 이런 글이 있다.
‘이때 문수사리는 멀리서 오른손을 펴서 백십 유순을 지나 와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면서 말하였다.
"착하고 착하다. 착한 남자여, 만일 믿는 뿌리를 여의었던들 마음이 용렬하고 후회하여 공 닦는 행을 갖추지 못하고 정근에서 퇴타하여 한 착한 뿌리에도 집착하고 조그만 공덕에도 만족하다 하여 교묘하게 행(行)과 원(願)을 일으키지 못하며, 선지식의 거두어 주고 보호함도 받지 못하며, 여래의 생각하심도 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러한 법의 성품. 이러한 이치. 이러한 법문. 이러한 수행. 이러한 경계를 알지 못하고 두루 알음과 갖가지 알음과 근원까지 지극함과 분명하게 이해함과 들어감과 해탈함과 분별함과 증득함과 얻는 것을 모두 할 수 없었으리라." ’
이렇게 문수보살이 칭찬을 한다.
돌아서서 다시 처음부터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가려는 그 마음, 그 마음을 딱 내는데 문수보살은 일백 이십 유순을 지나서 손을 뻗어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찬탄을 하고 있다. 그 순간 선재동자이 잊어버렸던 공부가 다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지만불이어초심(智滿不異於初心)이다. 지혜가 만족해졌다.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만나서 다 잊어버렸을 때 그때 지혜가 만족한 자리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초심과 마지막 마음이 다르지 않다.
불이어초심(不異於初心)이라는 말은 그런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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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위남구(寄位南求)에 :지위를 의지하야 남쪽으로 구해간다.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간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서 복성동쪽 대탑묘처에서 출발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일백 이십 성을 지나서 53선지식을 한 분 한 분 친견한다. 그 친견내용이 화엄경의 입법계품이다.
인원(因圓)이: 인행이 원만함, 원인이 원만해지는 것, 그것은 결국 결과이다.
불유어모공(不踰於毛孔)이로다 : 모공을 넘지 아니했도다.
이 모공은 보현보살의 모공이다. 보현보살의 모공에서 뛰어넘지 아니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하는 여정을 대충 보아도 지나간 성(城)의 숫자는 1백 2십 성이고, 어떤 선지식은 16년에 걸려 만났다. 대충 잡아도 그 햇수가 수백 년이 걸린다.
그렇게 오랜 세월 멀고 먼 길을 갔지만, 보현보살의 한 모공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늘 외우는 법성게에 한 먼지 속에 시방이 다 들어있다는 뜻으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표현이 있다. 시방이라고 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아승지의 시간 역시 이 먼지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다. 신기한 일이다.
또 한 편 이것은 첫 구절에 있는 선재동자가 처음 선지식을 친견하려고 하는 것과 마지막에 공부가 원만성취된 것과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하는 바로 그 구절이다.
우리 한 마음 속에 이미 결과가 그 속에 다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새카만 중생이라고 치자. 그런데 불과(佛果) 부처가 되는 그 어떤 결과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중생마음 속에 이미 갈무리되어 있다. 불과가 우리 중생마음 속에 이미 있는 것이다.그것이 둘이 아니다.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처음 발심의 마음을 냈을 때 곧 그대로 정각을 이룬 자리다. 그래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다. 본래부터 이름이 부처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화엄경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것이다.
달리 부처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부처가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부처가 되어있다는 이 사실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다른 변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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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미진지경권(剖微塵之經卷)에 :미진 속에 있는 경권을 쪼갠다는 것은 그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부(剖)는 분석한다 쪼갠다는 뜻이고, 미진지경권즉(微塵之經卷則)은 미진처럼 많고 많은 경전이라는 말이다.미진처럼 많고 많은 경전을 하나하나 분석할 것 같으면.
우리가 만일결사를 하고 이렇게 방대한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다.
화엄경만 하더라도 그 글자 한 자 한 자 얼마나 많은가.
많고 많은 경전 한 구절 한 구절에 또 한 순간 한 순간 우리가 공부하면 불과(佛果)를 이룰 수 있다. 과(果)는 부처, 불과라고 한다. 순간순간에 불과를 이룰 수 있다.
불과를 이루는 것은 한 생각 돌이키는데 있는 것이지 많이 공부한다고 꼭 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적게 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많이 공부하다 보면 어느 그물에 걸려도 걸리는 수가 더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새나 고기잡는 그물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는 그 고기가 그물코 하나에 걸리지만 그렇다고 구멍 하나만 허공에 걸어놓고 새를 잡으려고 한다면 만 년을 기다려도 새가 걸리지 않는다. 결국 걸리는 것은 한 구멍이지만 그렇다고 한 구멍만 놔두고 새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방편이 이렇게 먼지처럼 많고 많은 경권이 있음으로 해서, 화엄경과 같이 많고 많은 법문이 있음으로 해서, 인연이 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 어느 한 구절에 우리 마음이 계합하면 거기에 바로 자신이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진의 경권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에 있는 이야기다. 먼지 속에 화엄의 도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즉념념과성(則念念果成)이요 :순간순간 그대로 성불이다.
이 화엄경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티끌 속에 있었다. 한 먼지 속에 화엄경이 있었다.
화엄의 이치는 우주 만유가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원리를 그대로 표현하면서 거기에 맞게 설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먼지 속에서 가져왔는데 어떤 특정 먼지만 화엄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먼지 먼지마다 화엄경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안목 밝은 사람은 이 무거운 책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일거수일투족 천지 만물 삼라만상 속에 전부 화엄경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잘 기억하기 바란다. 화엄경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열쇠가 된다. 이런 내용이 납득이 안가더라도 말만이라도 기억해 놓으면 언젠가 가슴에 탁 와 닿을 때가 있을 것이다.
‘두두가 비로요 물물이 화장이다’ ‘낱낱이 다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물물이 다 화장찰해더라’ 라고 하는 말 역시 이런 내용에서 정리된 말이다. 두두 물물 속에 화엄경이 있고, 두두 만물이 곧 화엄경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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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생지원문(盡衆生之願門)에 :중생의 서원을 다함에. 중생은 얼마나 원(願)이 많은가. 바라는 바가 많고 소원이 많다. 꿈이 많다. 또 사실은 꿈이 많고 희망이 많아야 된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중생의 원의 문을 다한다면
즉진진행만(則塵塵行滿)이로다 : 먼지, 먼지마다 수행이 가득하도다.
먼지 하나하나에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이런 말이다. 거기에 육도만행이 만족되어진다. 하나하나 행위 속에서 우리 육도만행이 만족되어진다. 원의 문, 꿈을 하나하나 다 채워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한 순간 한 시간 내지 일 분 일 초 안에서도 우리의 소원의 행이 만족될 수가 있다. 크게 무언가를 만들고 이루고 눈에 보이는 수행을 따로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 하나하나, 천지 삼라만상 하나하나 속에 그대로 우리의 수행이 가득하다.
화엄의 도리를 궁구하면 기가 막힌 도리가 있다. 어떤 상황도 다 용납이 되고 다 이해가 된다. 그럴 수 없이 편안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우리들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모습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을 떠나서 사람의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서 눈을 뜬다면 바로 그 한 순간에 육도만행이 다 이뤄진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표현을 했다. 그것이 화엄경안에서 다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화엄경은 전체를 다 해야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또 화엄경처럼 가르침이 이렇게 많은 것은 보기 어렵다.
화엄경은 또 보면 볼수록 그 표현이 아름답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인간이 그 마음을 쓸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가 화엄경에 잘 표현되어 있고 잘 녹아 있다.
사실 이렇게 설명해서는 이 서문의 깊고 오묘한 맛을 천 분의 일이나 볼까 말까이다.
왕복서를 홀로 조용히 읊조리고 즐기면서 그 속에 있는 의미를 몸소 잘 느끼고 체득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화엄의 도리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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