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전/화엄경 왕복서

화엄경 왕복서-강설(4)

글쓴이00 2023. 10. 2. 22:50

4문

 

고요한 지혜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 만상을 다 품고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모든 물에 나뉘었도다.

보리수 밑에서 일어나지 않고 칠처(七處)를 법계에 펼치고

후제(後際)를 어기지 않고 구회(九會)를 처음 성도(成道)에서 나타내도다.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들에게 베푸시니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져 온 십불찰진(十佛刹塵)에 한꺼번에 두루하고

주인과 벗이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湛智海之澄波가 虛含萬象이요

잠지해징파 허함만상

皦性空之滿月이 頓落百川이로다

교성공지만월 돈락백천

不起樹王하사 羅七處於法界하시며

불기수왕 라칠처어법계

無違後際하사 暢九會於初成이로다

무위후제 창구회어초성

盡宏廓之幽宗하사 被難思之海會하시니

진굉곽지유종 피난사지해회

圓音落落에 該十刹而頓周하고

원음락락 해십찰이돈주

主伴重重에 極十方而齊唱이로다

주반중중 극시방이제창

 

 

제4門, 설법하는 위의가 두루 미치다[說儀周普] 

湛智海之澄波가 虛含萬象이요 / 皦性空之滿月이 頓落百川이로다//

不起樹王하사 羅七處於法界하시며 無違後際하사 暢九會於初成이로다/

盡宏廓之幽宗하사 被難思之海會하시니/圓音落落에 該十刹而頓周하고/

主伴重重에 極十方而齊唱이로다

 

 

고요한 지혜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 만상을 다 품고 [1,의지한 禪定]

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모든 물에 나뉘었도다.[2, 應身]

보리수 밑에서 일어나지 않고 七處를 법계에 펼치고 [3,經을 설한 장소]

後際를 어기지 않고 九會를 처음 成道에서 나타내도다.[4, 경을 설한 때]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들에게 베푸시니 [5, 가르침을 받는 대중]

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져 온 十佛刹塵에 한꺼번에 두루하고[6, 경을 설하는 근본]

주인과 벗이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7, 설법하는 위의를 따로 보임]

  

 

제4門 說儀周普

4.설법하는 위의가 두루 미치다

 

 

설의주보(說儀周普) : 

설법하는 위의, 형식이 널리 두루하다. 두루 주(周), 넓을 보(普), 넓게 두루했다. 

설법을 하는 형식 또는 의식이 어느 한 곳에만 설하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에서 설하고 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설법하신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신다’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신다’고

하지만 설법한 그곳에서만 부처님의 설법이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 가득히 함께 설법하고 있다.

깨어있는 안목으로 보면

우리도 지금 부산의 문수선원에서 화엄경을 설하고 있지만

부산 문수선원에서만 화엄경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온 국토에서 설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 설하고 있고, 온 우주에서 설하고 있다.

이렇게 설법하는 위의와 형식이 널리 두루하다고 하는 것을 4문에서는 일곱 줄에 걸쳐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현상을 깨달은 부처님의 안목으로 설명한다. 

누가 알아듣든지 못알아듣든지는 상관이 없다. 

중생들의 근기와 아무 상관없이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경지에 맞춰서 세계와 진리를 설법한다. 

그래서 화엄경은 쉬운 내용이기도 하고 아주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고 바람소리, 사람소리,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 심지어 시장에서 물건 흥정하고 떠드는 소리, 아이들 싸우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설법소리다. 

우리에게는 얼른 납득이 안되지만 이런 차원이 화엄경의 차원이다.

그래서 화엄경 처럼 쉬운 이치가 없고 화엄경 만큼 어려운 이치가 없다.

화엄경은 그야말로 대경(大經)이다. 천하에서 가장 길고 장엄하고 글이 풍부하고 뜻이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최고 경전이다. 

그런 까닭에 그 설하는 의식이, 어느 한 곳에서만이 설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다 두루 해당된다.

그러한 이야기를 4문에서 한다. 글이 워낙 함축이 심하고 아름답다. 

자꾸 쓰고 여러 번 읽고 읊조려 본다면 뭔가 그 뜻이 와 닿을 것이다.

     

 

1,의지한 禪定

湛智海之澄波가 虛含萬象이요

1.고요한 지혜바다의 맑은 파도가 텅 비어 만상을 다 품고

 

*

의지한 선정(禪定) : 

화엄경을 설하는 데도 반드시 의지한 선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화엄삼매(華嚴三昧)라고 부르고 다른 표현으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한다. 

바닷물이 맑으면 온 세상 만물이 그 위에 다 비친다. 그것이 해인삼매, 해인선정이다.

해인선정 속에 세상사, 세상의 만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들이 다 나타난다. 

선정속에 나타난 그대로를 우리에게 모두 설파하는 것이 화엄경이다.

 

*

잠지해지징파(湛智海之澄波)가 :

잠(湛)은 맑다는 뜻으로 담(湛)이라고도 읽는다. 지혜 지(智), 바다 해(海), 지혜바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소견이 좁으면 지혜라고 할 수 없다. 지혜는 바다처럼 툭 터져 넓어야 지혜다. 

고요한 지혜바다의 맑은 파도가, 징파(澄波)는 맑을 징(澄)자다. 

아주 깨끗한 지혜의 바다, 맑은 파도는 깨달음의 지혜이며 부처님의 지혜다.

그런데 지혜 바다의 지혜가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항상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흙탕물이 아니고 맑은 물결이다. 

이러한 지혜는 마음을 다 비우고 망상을 다 비워야 있을 수 있는 지혜다.

 

허함만상(虛含萬象)이라 : 

텅 비어 만상을 다 품는다. 이 허(虛)자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고 ‘허공처럼’이라고 했다가

다시 ‘텅 비어’라고 번역하였다. 마음이 비워져야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다.

허공은 만상을 포함한다. 지구도 포함하고 태양, 달, 온갖 위성들을 다 포함한다. 

이 지상에 건물을 아무리 짓고 부수고 또 짓고 부수고, 

나무가 자라고 베어지고 또 자라고 베어지고, 

사람이 오고 가고  

자동차가 오고 가고 

온갖 물건이 그 허공 속에 왔다 갔다 해도

허공은 그것들을 다 포함하고 용납한다. 그런 것이 함허만상이다.

제대로 깨달은 지혜라면 그와 같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상태여야 한다.

마음이 ‘이래야 된다’‘저래야 된다’ 하는 내 나름의 상식, 어떤 틀, 가치관, 생활방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사람의 삶이 용납될수 없다. 

자기 삶의 방식만 꼭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이것은 어리석다.

맑은 지혜가 있을 때 허함만상(虛含萬象)이 가능한 것처럼 내 삶의 방식을 비웠을 때 다른 사람의 삶이 보인다. 이것이 곧 삼매(三昧)다. 화엄경이 의지하는 삼매고 화엄경을 설할 때는 당연히 그 삼매가 근본이 된다. 해인삼매의 폭과 넓이와 깊이가 이와 같다.

     

 

2, 應身

皦性空之滿月이 頓落百川이로다

2.밝고 밝은 법성 하늘의 둥근 달이 한꺼번에 모든 물에 나뉘었도다.

 

*

응신(應身) :

32응신이라는 말이 있다. 

아수라에게는 아수라에게 맞도록, 

가루라에게는 가루라에게 맞도록, 

지옥 중생에게는 지옥 중생에게 맞도록 부처님이 나투신다. 

보살의 몸으로 제도할 사람에게는 보살의 몸으로 나투고, 

부처의 몸으로 제도할 사람에게는 부처의 몸으로, 

비구의 몸으로 제도할 사람에게는 비구의 몸으로, 

장자의 몸으로 제도할 사람에게는 장자의 몸으로 나툰다. 

이것이 부처님의 응화신(應化身)이다. 

달에다 비유한다면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다.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물이 있는 곳에는 달이 모두 비친다.

왕복서에서는 '밝고 밝은 법성하늘의 둥근달이 한꺼번에 모든 물에 나뉘었도다' 라는 표현으로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몸, 응신(應身)을 드러낸다. 

불교의 이치가 깊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이치를 표현하는 글도 이렇게 아름답다.

 

*

교성공지만월(皦性空之滿月)이: 밝고 밝은 법성하늘의 둥근달이

돈락백천(頓落百川)이다: 한꺼번에 모든 물에 나뉘었도다.

밝을 교(皦)자는 밝을 명(明)자보다도 더 밝은 것을 말한다. 

밝고 밝은 법성의 하늘, 이것을 우리 성품의 하늘이라고 해도 좋다. 

공(空)은 하늘을 뜻한다. 

천(天)대신 공(空)으로 하늘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아주 밝은 성품, 깨끗한 성품의 하늘에 떠있는 둥근달, 

그 보름달이 백이나 되는 내나 강, 하천, 바다에까지 다 쏟아부어져 있다. 

하늘에 달이 한 개 떠 있으면 물이 있는 곳마다 다 달이 비친다. 

강릉 경포대에 가면 ‘달이 술잔에도 비치고 호수에도 비치고 바다에도 비치고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의 눈동자에도 비친다’는 말도 있다.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다. 

하늘에 달은 천강이라고 하는 온갖 곳에 다 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시는 그 설법의 몸은 모든 곳에 다 두루있다.

부처님의 몸이 5척이나 6척, 7척되는 한정된 몸에 있는 것처럼 존재해서는 도대체 이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런데 깨달음의 안목에서 볼 때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는 몸은 온 우주법계에 가득 차 있다.

부처님 본래의 법신은 하나이지만, 사람마다 맞춰서 응해주는 응신은 여럿이다. 

그것을 하늘에 뜬 달과 내에 비친 달로 비유했다. 

달은 하나인데 물이 있는 곳에 다 달이 비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몸은 하나이면서 또한 전체에 다 있다.

 

 

3,經을 설한 장소

不起樹王하사 羅七處於法界하시며

3.보리수 밑에서 일어나지 않고 七處를 법계에 펼치고

 

*

경(經)을 설한 장소 :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일주일간 선정에 들었다가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그 보리수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곱 곳[칠처(七處)]에서 설법을 하였다.

화엄경의 구성을 보면 초회(初會) 이회(二會) 삼회(三會) 사회(四會) 오회(五會) 육회(六會) 칠회(七會) 팔회(八會) 구회(九會)라고 하는

아홉 번의 법회를 보리장(菩提場)이라고 하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설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 도리천궁(忉利天宮) 야마천궁( 夜摩天宮) 도솔천궁(兜率天宮) 타화천궁(他化天宮) 기타원림(祗陀園林)이라고 하는 일곱 곳에서 설했다. 

보광명전에서는 법회가 3번 열렸다. 

이것을 칠처구회(七處九會)라고 하는데 법회가 열린 공간인 칠처(七處)는 온 법계를 아우른다.

 

*

불기수왕(不起樹王)하사 : 부처님이 성도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채

라칠처어법계(羅七處於法界)하시며: 칠처(七處)를 법계(法界)에 펼쳤다.

보리수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일곱 곳에서 설법한 것을 법계에 펼쳤다.

수왕(樹王)은 부처님이 성도한 보리수 나무를 말한다.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동네에 있는 닥나무도 아니고 소나무도 아니고 보리수나무가 이 세상 나무중에서 왕이다. 

당연히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수가 나무중의 왕이라고 알아야 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태국이나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 이런 데서는 사찰마다 큰 보리수가 당연히 있고, 

보리수를 부처님 대신으로 존경한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가 됐기 때문이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닫고 나서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설했다. 
그 보리수나무 아래서 일어나지 않고도

도솔천에도 올라가고 도리천에도 올라가고 수미산이나 야마천에도 올라가서 화엄경을 설했다. 

화엄경의 승도솔천궁품과 같이 부처님이 천상에 올라가서 설한 품에 보면 

‘불기수왕(不起樹王)’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부처님이 성도한 보리수를 떠나지 아니한 채

야마천에 올라가고 도솔천에 올라가고 화락천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 아래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면서 여러 천상에 오른다고 하는 그 말은

부처님이 항상 깨달음의 안목에 근거해서 별별 장소, 별별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설법을 한다는 뜻이다.

어른이 어린 손자와 논다고 해서 손자의 수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은 항상 어른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그 상대의 근기, 수준에 따라서 다 맞춰준다. 그와 같은 의미로 봐도 좋다.

 

 

4, 경을 설한 때

無違後際하사 暢九會於初成이로다

4.後際를 어기지 않고 九會를 처음 成道에서 나타내도다

 

*

경을 설한 때 :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법성게(法性偈)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라고 하였다. 

일념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 짧은 한 순간 속에 한량없는 세월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그 순간 속에 이미 우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법회하는 것이 부처님이 성도한 그 순간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또 화엄경 공부를 하고 있는 이 순간 속에 부처님이 2700년전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신 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시간도 공간도 다 초월한 것이 화엄경의 도리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가 이렇게 법회를 하지만

이것이 사실은 부처님이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 그대로 있으면서 설하는 설법이기도 하다.

그 때 듣던 그 신도들이 바로 여러분이고 그때 설하던 부처님이 지금 나다. 

그대로 보리수 밑에서 설하던 법회가 2700년 세월을 순식간에 걸쳐서 이 자리에서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현상적으로 보면 안되고 이치로 봐야 된다.

사실은 전부 그렇게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 있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하루 가운데 ‘1초가 비었다’고 하면 그 하루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니 백 년 가운데 1초가 비었어도 그 백년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되어 있다.

 

 

*

무위후제(無違後際)하사 : 

마지막 법문을 후제라고 한다. 마지막을 어기지 아니하고

창구회어초성(暢九會於初成)이로다 : 

아홉 번의 법회를 열었는데 그 9회를 처음 성도에서 나타내도다. 

초성(初成)이란 처음 정각(正覺) 이룬 것을 말한다. 

화엄경이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에 걸쳐서 법회를 했다고 하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그런데 일곱 곳에서 아홉 회에 걸친 법회가 그 처음 정각을 이루신 데서 다 펼쳐보여진 것이다. 

이것은 정각 이루자마자 구회의 법회가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성도한 보리수 밑에서 7처를 열고, 성도한 그 도리에서 화엄경의 끝까지 법문을 다 이야기한 것이다. 

크게 보면 화엄경 뿐만 아니라 열반경까지도 성도한 데서부터 시작한 것이고 성도한 그 자리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것을 좀 깊이 음미해보면 의미심장하다. 또 아주 멋지다.

오늘 이 순간의 우리들의 법회까지도 부처님의 초성(初成) 처음 정각을 이룬 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아이가 앙앙하고 울면서 태어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일생이 다 포함되어 있다. 

태어나자마자 그 사람은 몇 살을 살것인지 어느 학교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할것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

일생을 살면서 아무리 수십 번 직업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 수십 번 바뀌는 직업마저도 처음 태어나는 그 순간에 다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이 처음 성도한 그 속에 우리 불자들이 전부 포함되어 버렸다.  

누구는 출가해서 스님이 될 것이다 하는 것까지 다 포함되어 있고, 

어떤 신도가 절에 와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불공을 드리고 어떤 기도를 할 것이다 하는 문제까지도

초성(初成)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치가 화엄경의 이치다.

화엄경에서 밝힌 이런 이치를 환하게 꿰뚫어서 알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을 정말 복되게 살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

화엄경은 뜻이 워낙 깊다. 그러면서도 우리 일상생활과 연관되어 있다.

오묘불가사의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런 한 구절도 잘 음미하면서 반복해서 읽어보고 생각해보는 훈련을 해야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가 좀 더 우리 가슴에 와닿을 수 있다.

 

 

5, 가르침을 받는 대중

盡宏廓之幽宗하사 被難思之海會하시니

5.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를 다 설하여 한량없는 대중들에게 베푸시니

 

*

가르침을 받은 대중:

화엄경 가르침을 받는 많고 많은 사람들, 생명들, 유형무형의 존재들, 바다처럼 넓고 넓은 법회 대중들에게 전부 이익이 돌아가게 했다. 

 

*

진굉곽지유종(盡宏廓之幽宗)하사 : 크고 넓고 유현한 종지를 다 설한다.

피난사지해회(被難思之海會)하시니 :그래서 한량없는 대중에게 다 베푼다.

진(盡)은 다했다. 굉곽(宏廓)은 넓고 크다는 뜻이다. 

굉확이라고도 발음한다.넓을 확(廓) 또 곽이라고도 한다.크고 그윽한 종지, 그윽한 취지다.

유종(幽宗)은 그윽하다는 뜻이다. 그윽한 화엄경의 취지를 다 담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난사지해회(難思之海會)에다 입혔다고 새긴다.

난사(難思)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생각할 수 없는 그 많고 많은 대중들, 난사지해회란 불가사의한 대중의 모임, 바다와 같이 드넓은 대중모임이다. 

말하자면 온갖 사람, 부산 사람만이 아니라 온 국민, 온 세계, 온 우주에 있는 온갖 생명,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형(有形) 무형(無形)까지 모든 대중들이 전부 화엄법회의 청중에 다 해당된다.

그런 대중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해회(海會)라고 했다. 

바다 해(海)자, 법회(法會)라고 하는 모일 회(會)자. 바다와 같이 넓고 넓은 많은 법회대중들에게 이 화엄경을 다 입혔다. 

은혜를 베풀어서 그 사람들에게 다 이익이 돌아가게 했다.

지금 문수선원에서 열리는 불자를 위한 화엄경 법회를 통해 법문을 듣는 200여명의 우리 대중들만이 그 이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중에 대표가 여기 모인 우리다. 

대한민국에서도 우리고 전세계 불자들을 생각하더라도 사실 화엄경을 이렇게 알뜰하게 공부하는 대중은 여기 뿐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도리는 우리만이 아니라 전 인류, 전 생명이 다 화엄의 도리를 전부 입고 있고 화엄의 이익을 받고 있다.

내가 참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씩이지만

이 시대에 문수선원에서 이백여 분의 스님들이 모여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법석이 열리는 일이다.

많은 스님들이 모여서 이런 법회를 하는 것이 그대로 바다와 같이 드넓은 회상인 해회(海會)다. 

한 스님에게 일반 신도 백 명만 딸려있다손 치더라도 대단한 숫자다. 

그런데 신도가 백 명이 넘는 스님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천 명 이상 되는 스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드넓은 대중들에게 입힌다[被], 부처님의 법을 베푸는 것이다.

 

 

 

6, 경을 설하는 근본

圓音落落에 該十刹而頓周하고

6.원만한 음성이 멀리 퍼져 온 十佛刹塵에 한꺼번에 두루하고

 

 

*

경을 설하는 근본 :

다른 경전은 부처님이 설하는 경전인데 반해서 화엄경은 39품 중에서 부처님이 직접 설한 품은 단 두 품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부처님을 의지해서 보살들이 부처님을 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와

그 능력과 방편과

과거의 수행과 그 과거 수행의 내용과

과거 수행의 시간들 이러한 부처님에 관한 것들을 보살들이 끝없이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의 내용이 전부 부처님의 교화와 그 행적들을 설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 아닌 보살의 음성이라도 원음락락하게 들린다.

멋지고 원만한 음성이 널리 퍼지는 것이다.

그것이 십불찰진에 한꺼번에 다 그렇게 두루한다.

‘경을 설하는 근본’이 그렇게 되어 있다.

*

원음락락(圓音落落)에 : 

원만한 음성이 널리 퍼져

원만할 원(圓)자, 소리 음(音)자 원음이란 한 소리 가운데 일체 소리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음(圓音)이다. 어디에 치우친 것이 없다. 모든 주의주장과 소견을 전부 다 감싸안는다. 

이렇게 원만한 소리이면서도 하나하나 놓칠 수 없게 너무나도 분명분명하고 그 소리가 멀리까지 간다.

 

해십찰이돈주(該十刹而頓周)하고: 

십불찰진에 한꺼번에 두루하고.

십찰(十刹)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인 불찰(佛刹)이다. 

부처님의 이 넓고 많은 세계를 십불찰(十佛刹)이라고 한다. 

그냥 십불찰이 아니라 십불찰진(十佛刹塵)이라고 해서 

먼지 진(塵)자까지 하면 그 많고 많은 세계를 먼지처럼 갈아서 만든 많고 많은 세계라는 뜻이다. 

거기에 돈주(頓周)한다. 

몰록 돈(頓)자, 두루할 주(周)자. 어마어마한 넓고 넓은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해(該)자는 포함한다는 뜻이다.

다 포함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화엄설법이 원음락락(圓音落落)해서 온시방 세계를 지금 한꺼번에 두루한다. 

오늘 주고 내일 주고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두루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 소리가 온세계 그리고 온우주법계에 한꺼번에 다 퍼진다. 다 포함해서 설해지고 있다.

 

 

7, 설법하는 위의를 따로 보임

主伴重重에 極十方而齊唱이로다

7.주인과 벗이 중중하여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

화엄경은 주인과 벗이 중중(重重)하여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한다. 이것을 주반중중하다고 한다. 

이것은 화엄경을 설하는 형식이며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원리다. 

보살들이 서로서로 주인과 객이 되면서,서로 돌아가며 주인과 객의 역할을 바꾸어서 다 같이 부처님의 경계를 이야기한다.

우주가 현재 주반중중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원리대로 화엄경 법문이 주반중중중으로 거듭거듭 무진하게 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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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반중중(主伴重重)에 : 

어떤 사람이 주인이 되면 상대는 벗이 되고, 

또 상대가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이 벗이 된다. 

주(主)는 주인이고 반(伴)은 벗이다. 

예를 들어서 반상회를 할 때, 오늘은 A라는 집에서 반상회가 열리면 오늘은 A가 주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반(伴)이다. 

다른 날 B라고 하는 집에서 반상회가 열리면 그날은 A가 반(伴)이 되고 객이 된다. 물론 그 때는 B가 주다. 

친구집에 갔을 때도 내가 친구집에 갔을 때는 나는 벗이 되고 친구가 주인이다. 

그 친구가 우리집에 왔을 때는 내가 주인이고 그 친구는 벗이 된다.

법회 역시 그렇다. 누구의 수준이 높고 누구의 수준은 낮아서 법회의 주인이 되고 벗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설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면 듣는 사람은 무조건 반(伴)이다. 

그날 반이 되었던 사람이 반대로 어디선가 설법을 한다면 그는 주인이 되고 나머지가 다시 전부 반(伴)이 된다.

고정된 주인이 따로 없다.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기도 하고 벗이 되기도 한다. 

주인과 벗이 중중 중중하고 무진 무진하다. 

이 세상이 모두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치가 그러하고 화엄경 역시 늘 그렇게 설해진다. 

우주가 주반이 중중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화엄경에서는 그러한 이치를 거듭거듭 다 설하고 있다.

 

극시방이제창(極十方而齊唱)이라 : 

모든 시방에서 다 같이 노래하도다. 

극시방이란 시방에 다해서라는 뜻인데 ‘온시방에’라고 보면 된다. 

온시방에서 가지런히 부처님이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인이면 여러분들은 반이 되고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하면 내가 반이 된다.

화엄의 이치에서 보면 전세계 사람들이 전부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느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주산신이 나오면 십 명의 주산신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방향을 나타낼 때 팔방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굳이 시방을 말한다. 

이것은 열 가지 방향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십이라고 하는 숫자를 통해서 ‘완전무결하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상은 알고 보면 현재 있는 이대로 완전무결한 곳이다

우리의 삶은 완전무결하다우리는 완전무결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이대로 완전무결하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서 따로 무슨 수행을 하는 이야기들이 화엄경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