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왕복서-강설(3)
3문
그러므로 우리 세존(世尊)께서 십신(十身)이 처음 만족함에 정각(正覺)을 이루고,
서원(誓願)과 수행(修行)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
허공과 합하여 체성이 되시니,
부유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은 먼지 하나 없도다.
故我世尊이 十身初滿에 正覺始成하사
고아세존 십신초만 정각시성
乘願行以彌綸하시며 混虛空爲體性하시니
승 원행이미륜 혼허공위체성
富有萬德이요 蕩無纖塵이로다
부유만덕 탕무섬진
제3門,敎主는 헤아리기 어렵다[敎主難思]
故我世尊이 十身初滿에 正覺始成하사/
乘願行以彌綸하시며/ 混虛空爲體性하시니/
富有萬德이요 蕩無纖塵이로다
그러므로 우리 世尊께서 十身이 처음 만족함에 正覺을 이루고, [1, 佛果가 가득함]
誓願과 修行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2, 因行이 깊음]
허공과 합하여 체성이 되시니, [3, 體性이 깊음]
부유함에는 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은 먼지 하나 없도다.[4, 德을 갖추었음]
제3門, 敎主難思
敎主는 헤아리기 어렵다
교주난사(敎主難思) : 교주(敎主)는 부처님을 뜻하지만 우리 모두를 뜻하기도 한다. 난사(難思)는 어려울 난(難)자, 생각 사(思)자, 생각해내기 어렵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이다. 낱낱 사람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을 대표로 들어서 부처님의 위대한 점, 불가사의 한 점을 표현하였다.
1, 불과(佛果)가 가득함
故我世尊이 十身初滿에 正覺始成하사
그러므로 우리 세존께서 십신이 처음 만족함에 정각을 이루고
*
고아세존(故我世尊)이: 그러므로 우리 세존께서
십신초만(十身初滿)에 :십신이 처음 만족함에 수행이 가득 차서
정각시성(正覺始成)하사 : 비로소 정각을 이루었다.
*
화엄경 서두에 시성정각(始成正覺)이 나온다.
여기 초만(初滿)은 막 가득해지자마자, 수행이 꽉 차자마자라는 뜻이다.
초(初)자가 겨우 재(纔)자와 같다.
부처님의 수행이 깨달음 직전까지 꽉 찬 것을 십신으로 표현했다.
부처님이 깨닫기까지 화두일념이 되어서 오매일여 되었다거나,
박사학위를 백 개쯤 땄다거나, 선정이나 지혜가 가득했다는 소리는 하나도 안하고
열 가지 몸이 가득했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점이다.
화엄경을 잘 아는 사람만이 이렇게 표현 할 수가 있다.
우리 개개인도 열 가지 몸이 다 갖춰졌을 때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
열가지 몸인 십신(十身)이란
1. 중생신(衆生身)
2. 국토신(國土身)
3. 업보신(業報身)
4. 성문신(聲聞身)
5. 연각신(緣覺身)
6. 보살신(菩薩身)
7. 여래신(如來身)
8. 지신(智身)
9. 법신(法身)
10.허공신(虛空身)이다.
부처님은 이 십신을 모두 갖췄다.
*
열가지 몸 중에
첫째가 중생신이다.
중생의 몸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라고 하면 중생인 우리하고는 대단히 거리가 먼 분 같지만 부처님도 중생의 입장이 있다.
부처님이 되어서 중생의 사정을 모른다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국토신이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국토가 부처님 당신의 몸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국토에 몸을 담고 살았다. 그래서 국토신이 있다.
현대의 우리는 이 국토를 차를 타고 다니고 비행기도 타고 다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런 방법도 없어서 걸어만 다녔다.
겨우 걸어서 다닐 수 밖에 없는 국토였으니
부처님의 국토가 우리보다 훨씬 못한 국토였다.
부처님에게도 업보가 있다. 중생만 업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청정업(淸淨業)이든 죄업(罪業)의 과보(果報)든 부처님에게도 업보가 다 있다.
부처님이 우리 자신이면서 우리 모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생들의 업보가 부처님의 몸이 된다.
성문, 연각, 보살, 여래 네 가지도 부처님의 몸이 된다.
부처님도 성문이 필요할 땐 성문의 몸이 되고
연각이 필요할 땐 연각의 몸이 된다.
중생이 필요할 땐 중생의 몸으로,
보살이 필요할 땐 보살의 몸을 갖춘다.
여래가 필요하면 여래의 몸으로 당신의 몸을 갖춘다.
거기에 더해서 지혜의 몸도 갖췄고 또한 법의 몸도 갖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공의 몸까지 갖추었다.
*
십신 가운데 중생신(衆生身), 국토신(國土身), 업보신(業報身)은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다.
국토(國土)는 우리가 사는 곳이다. 또 우리는 각자 나름의 업보(業報)를 가지고 있다.
성문(聲聞)은 소리 성(聲), 들을 문(聞)자를 써서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성문이다.
여기서 소리는 불법이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성문이 아니다.
우리도 불법을 공부하고 있으므로 성문신을 갖췄다.
그래서 불자라면 십신중에 중생신(衆生身) 국토신(國土身) 업보신(業報身)과 함께 성문신(聲聞身)은 백퍼센트 가지고 있다.
또 한편 어떤 경험을 통해서라든지 일을 당했을 때 스스로 이치를 깨닫는 수가 있다.
독각은 홀로 스스로 깨닫는다는 말이다.또 보살행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독각신(獨覺身)이나 보살신(菩薩身)이나 여래신(如來身)은 누구나 갖고 있는 몸은 아니다.
이쪽으로 갈수록 우리에게 해당되는 프로테이지가 낮아진다.
물론 우리도 독각(獨覺)이 될 수도 있고 보살(菩薩)이 될 수 있고 여래(如來)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본성은 모두 여래신이기도 하다.
지신(智身)은 지혜의 몸인데 지혜가 당연히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도 지혜가 어느 정도는 있다.
법신(法身)은 진리의 몸이다.
허공신(虛空身)이 나오는데 온갖 수행의 삶을 살든 수행이 없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든 따지고보면 모두 이 허공위에 건립이 되어 있다.
근본은 공(空)이라고 하는 의미도 된다.
법신(法身)이나 허공신(虛空身)은 누구에게나 공히 적용된다.
우리에게도 백퍼센트 해당이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처음 완전하게 갖춤에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
부처님이 이러한 열 가지 몸이 만족해지자마자 곧 비로소 정각을 이뤘다.
이 구절은 앞으로 화엄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열쇠가 된다.
2, 인행(因行)이 깊음
乘願行以彌綸하시며
서원(誓願)과 수행(修行)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
*
인행이 깊음 :
우리의 대표는 세존(世尊)인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이 분이 열가지 몸을 갖춰서 정각을 이룬 다음엔 무엇을 하는가.
원력과 행을 의지해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두루 감싼다.
*
승(乘) 원행이미륜(願行以彌綸)하시며 : 승을 띄고 원행이미륜이라고 읽어야 한다.
승(乘)은 탈 승(乘)자인데 원과 실천행에 올라탄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거기에 의지한다는 뜻도 된다.미륜은 천천히 두루두루 감싸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선과 수행에 의지하여 두루 감싸며 중생들을 건리다.
그렇게하는데 무슨 재산과 무슨 실력으로써 건지겠는가.
오로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실천행에 의지해서 천천히 두루 감싼다.
3, 체성(體性)이 깊음
混虛空爲體性하시니
허공과 합하여 체성이 되시니,
*
체성이 깊음 :
부처님이 원력과 실천행을 의지해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두루 감싸는데
부처님의 몸이나 성품이 어느 정도라야 그렇게 되는가.
부처님의 몸과 성품은 허공과 크기가 같다.
부처님은 허공자체로써 체성을 삼았다.
*
혼(混) 허공위(虛空爲) 체성(體性)하시니 :
허공과 합해서 자기의 체성이 되었다.
혼(混)자는 혼합한다는 뜻이다.
허공(虛空)을 합해서 체성(體性)을 삼는다.
우리에게도 원력이 있지만 여기까지 되기는 부족하다.
더구나 옳다 그르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분별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부처님은 허공을 합해서 허공자체로서 체성을 삼았다.이쯤은 되어야 하다.
부처님이 당신의 원력과 실천행을 의지해서
온 우주 온 법계에 부처님의 능력과 법력이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 작다.
혹여 활동을 많이 하는 이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확대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은 겨우겨우 제 한 몸을 추스르며 살 뿐이다.
집안에서도 자기 위치가 위축되어서 미미하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나 이웃에서나 어떤 모임에 나가서도
자신이 그가 있는 자리를 완전히 휘젓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허공같이 큰 몸은 아니어도 그런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체성이 좀 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능력이란 그런 정도가 아니다.
부처님의 능력은 허공을 합해서 체성을 삼았다.
그 능력이 허공처럼 크다는 이야기다.
4, 덕(德)을 갖추었음
富有萬德이요 蕩無纖塵이로다
부유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은 먼지 하나 없도다.
*
부유만덕(富有萬德)이요 :
부유하기로는 만덕을 소유했다. 좋은 구절이다. 부자 부(富)자가 앞에 나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우리 개인적으로는 지위도 없고 재산도 얼마 안 되고
배운 것도 별로고 세상에서 안 알아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별로 안 알아준다.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그 내면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엄경을 강의한다. 천하에 화엄경을 제대로 강의 하는 데가 어디에 있느냐, 어디가서 듣느냐’ 하고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공부를 하려는 그 마음, 그 능력이야말로 최고 부자다.
만덕(萬德)을 갖췄다. 세속적으로 부유하다고 할 때는 부유(富裕)라고 넉넉할 유(裕)자를 쓴다. 여기는 부유(富有)라고 했다.
부(富)로는, 넉넉하고 풍부하기로는 만덕(萬德)을 소유하고 있다.우리는 다 그렇다. ‘
나는 만(萬)가지 덕(德)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부자다.’ 무엇이 부자인가.
봐야할 때 볼 줄 알고 들어야할 때 들을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어디 좋은 법회가 있다고 하면 기를 쓰고 가서 듣기도 하고
또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한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냥 버럭 화도 낼 줄 안다.
이보다 더 큰 부자가 어디에 있는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완전하다.
여기에 눈을 떠야 한다.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나의 것이 나에게 이미 갖춰져 있다.
이런 데에 눈을 뜨면 우리는 현재 이대로 정말 훌륭하고 충분하다.
만덕을 소유했으니 더 이상 급급할 것이 없다.
*
탕무섬진(湯無纖塵)이로다 : 텅 비어 없는 입장으로서는 먼지하나 없다.
탕(蕩)은 소탕한다, 전부 비운다는 말이다. 쓸어버려서 섬진(纖塵)도 없다. 작은 먼지도 없다.
부(富)한 쪽으로는 만덕을 가지고 있어서,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만덕이 작용을 한다.
그런데 근본을 가만히 추궁해 들어가 보면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 텅 비운 입장에서는 먼지하나 없다.
사실은 없으니까 많은 것이다. 없으니까 그 가운데 얼마든지 건립이 된다.
예를 들어서 공터라야 빌딩을 짓는다. 무엇인가가 꽉 차 있다면 빌딩을 짓지 못한다.
어느 장소에 재개발을 한다면 이미 있던 건물들을 싹 없애고 거기에 새로운 건축물을 세운다.
탕(湯)은 소탕한다고 할 때의 탕이다.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섬진(纖塵)도 안남긴다. 먼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의 본래 마음이 그렇게 생겼다.
우리 개개인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개개인의 마음의 법칙을 그대로 활용해서
아파트를 지을 때나 학교를 지을 때도 그 마음의 이치에 맞게 표현하는 것이다.
본래 이치대로 세상의 이치 역시 그에 맞추어 돌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신기한 일이다.
‘알박기 땅’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해놓으면 길도 제대로 못내고 건물도 제대로 못짓는다.
서울의 유서깊은 절에서 주변 학교와 땅값으로 실랑이를 하다가 도저히 땅을 팔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는 절 주변의 땅을 둥글게 돌아가며 다 사버렸다.
그리고는 절에 햇빛도 안들게 건물을 하늘처럼 지었다.
더구나 절 쪽으로는 화장실을 지어버렸다.
어느 절이라고 이름을 못대겠는데 그런 일도 있다.
이치대로 하지 않으면 일이 그렇게 된다.
부유만덕이 되려면 우선 탕무섬진이 되어야 한다.
전부 쓸어 깨끗이 없애서 그것이 부유만덕이 된다.
텅 빈 데라야 온갖 것을 다 세울 수가 있다.
*
부유만덕(富有萬德)이나 탕무섬진(湯無纖塵)이라
이 구절은 내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다. 옛날에 탄허스님이 이 대목을 나에게 써주곤 했다.
모필글씨를 쓰는 이가 있다면 '탕무섬진 부유만덕'이 짝이다.
표현도 아주 근사한데 이 구절에 대한 주해가 많다.
이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로 하면 정말 모든 이치를 여기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풍부한 입장, 좋은 입장에서 볼 때 만덕을 갖췄다.
또 섬진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번뇌, 사량분별, 안좋은 감정 등 나쁜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싹 쓸어서 먼지만큼도 없게 하였다.
이것이 교주난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큰 위대함이다.
화엄경의 첫품인 세주묘엄품의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전부가 교주의 난사다.
이것을 왕복서 서문에서 다 이야기 하려면 화엄경을 다 이야기 해야 하니까
이렇게 간략하게 멋진 글로 표현했다.
*
부유만덕(富有萬德)이나 탕무성진(湯無纖塵)이라고 하는 이 구절에 소개하려고 적어온 게송이 있다.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마음을 모두 헤아려 알고
큰 바다에 가득 찬 물을 다 마실 능력이 있다 하여도,
사방의 허공을 가히 측량할 수 있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잡을 능력이 있다 하여도,
부처님의 공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도다. <화엄경>
*
우리가 많이 듣던 염불이고 익숙한 게송이다.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세계 찰(刹)자다. 이 세계, 이 지구를 먼지로 만들어서 그 먼지숫자와 같이 많고 많은 우리들 마음을 찰진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루동안만 지어내는 생각과 마음이라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잠에서 깨어나서 지금 이 순간에 오기까지 그 마음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데 세계를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먼지숫자와 같은 많고 많은 마음작용들을 가히 헤아려 안다고 하였다.
그것이 가능하여서 온 중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까지를 다 안다고 하여도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이라 :
저 태평양 바닷물을 다 마신다하더라도.
한 컵 물도 제대로 못마시는데 태평양 바닷물을 어찌 다 마시겠는가.
그러나 다 마신다 하더라도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허공을 가히 헤아린다 하더라도.
허공이 얼마나 넓은지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움켜잡고, 태풍이 불어와도 그 태풍을 딱 휘어잡는다 하더라도.
가계(可)할 때 계(繫)자가 맬 계(繫)자다. 밧줄로 매든지 뭘로 매든지 딱 맨다.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다:
능히 부처님의 공덕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찰진심념가수지나 대해중수가음진나 허공가량풍가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설사 그런 것까지 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한가.
여기 부처님은 우리 개개인이다.
어떤 능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우리 불성자리의 공덕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 개개인의 능력, 타고난 본성의 기능들을 다 헤아릴 수가 없고 다 설명할 수가 없다.
*
청량국사는 이 화엄경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고 또 얼마나 좋아했는지 뒤에가면 ‘내 죽을 곳을 얻었다, 득기사소(得其死所)'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화엄경에서 죽어야지’ 라고 하였다. 참 훌륭한 분이다.
이 분은 102세까지나 살아서 이러한 명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