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전/화엄경 왕복서

화엄경 왕복서-강설(10)

글쓴이00 2023. 10. 16. 20:33

10문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는 경전의 총명이며, 세주묘엄품제1이란 곧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다른 이름이다.

대(大)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方)은 정법을 스스로 가짐이요, 광(廣)은 체에 합하여 두루함이요, 불(佛)은 현묘함을 깨달음이요, 화(華)는 공덕만행을 비유함이요, 엄(嚴)은 법을 꾸며 사람 이룸을 말함이요, 경(經)은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댐이다.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가없이 드넓은 회중들을 포섭하며, 아주 먼 옛날의 항상한 법규를 지으니, 부처님과 여러 제왕을 아울러 세상의 주인이라 일컫고, 법문과 의보와 정보를 함께 미묘한 장엄이라 한다. 뜻의 종류를 나누어 품의 이름을 드러내어 여러 편의 첫머리에 두어 제일이라 일컫는다.

이 경이 39품이 있으니 이 품이 처음에 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이라 한다.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即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 즉무진수다라지총명

世主妙嚴品第一者는 即衆篇義類之別目이로다

세주묘엄품제일자 즉중편의류지별목

大以曠兼無際요 方以正法自持요 廣則稱體而周요

대이광겸무제 방이정법자지 광즉칭제이주

佛謂覺斯玄妙요 華喻功德萬行이요 嚴謂飾法成人이요

불위각사현묘 화유공덕만행 엄위식법성인

經乃注無竭之涌泉이로다

경내주무갈지용천

貫玄凝之妙義하고 攝無邊之海會하며 作終古之常規하니

관현응지묘의 섭무변지해회 작종고지상규

佛及諸王을 並稱世主요 法門依正을 俱曰妙嚴이라

불급제왕 병칭세주 법문의정 구왈묘엄

分義類以彰品名하야 冠群篇而稱第一이라

분의류이창품명 관군편이칭제일

斯經이 有三十九品하니 此品이 建初라

사경 유삼십구품 차품 건초

故云 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고운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제일

  

제10門,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略釋名題]

1,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雙標二目]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即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世主妙嚴品第一者는 即眾篇義類之別目이로다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는 경전의 총명이며, 세주묘엄품 제1이란 곧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다른 이름이다.

 

2,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석하다[雙釋二目]

大以曠兼無際요 方以正法自持요 廣則稱體而周요 佛謂覺斯玄妙요 華喻功德萬行이요 嚴謂飾法成人이요 經乃注無竭之涌泉이로다

대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은 정법을 스스로 가짐이요, 광은 체에 합하여 두루함이요, 불은 현묘함을 깨달음이요, 화는 공덕만행을 비유함이요, 엄(嚴)은 법을 꾸며 사람 이룸을 말함이요, 경(經)은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댐이다.

 

貫玄凝之妙義하고 攝無邊之海會하며 作終古之常規하니 佛及諸王을 並稱世主요 法門依正을 俱曰妙嚴이라 分義類以彰品名하야 冠群篇而稱第一이라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가없이 드넓은 회중들을 포섭하며, 아주 먼 옛날의 항상한 법규를 지으니, 부처님과 여러 제왕을 아울러 세상의 주인이라 일컫고, 법문과 의보와 정보를 함께 미묘한 장엄이라 한다. 뜻의 종류를 나누어 품의 이름을 드러내어 여러 편의 첫머리에 두어 제일이라 일컫는다.

 

3,경과 품의 제목을 결론짓다[雙結二目]

斯經이 有三十九品하니 此品이 建初라 故云 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이 경이 39품이 있으니 이 품이 처음에 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이라 한다.

 

 

제10門, 略釋名題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

 

약석명제(略釋名題) : 명제를 간략하게 해석하다. 왕복서를 열 개의 문(門)으로 분류를 했는데 그 중 마지막 10門이다.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이런 것이 명제다. 그것을 가지고 길게 설명하면 책 한 권이 된다. 청량스님의 소초에 보면 이런 것이 상당히 장황하게 해석되었는데 여기는 서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주 기본적인 해석만 간략하게 되어 있다.

 

 

1,雙標二目

1.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

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即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世主妙嚴品第一者는 即眾篇義類之別目이로다

제목을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 것은 다함이 없는 경전의 총명이며, 세주묘엄품 제1이란 곧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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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표이목 (雙標二目) :경과 품의 제목을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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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칭대방광불화엄경자(題稱大方廣佛華嚴經者)는: 제목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말한 것은

즉무진수다라지총명(卽無盡修多羅之總名)이며 : 삼장을 포함한 수많은 경전들, 무진수다라를 한마디로 말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불교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이것을 분류하면 3장 12분교로 나뉜다. 경(經) 율(律) 론(論) 3장(三藏)이 기본이 되고, 뒤에 또 선장(禪藏)이라고 하는 것이 첨가된다. 그래서 삼장 대신 4장(四藏)이라는 말을 써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선장은 엄격히 따지면 삼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선불교 전적들이 다른 어떤 분야의 불교 책보다 훨씬 더 많다. 특히 한국 불교는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선장을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다 함이 없는 수다라가 무진수다라(無盡修多羅)다. 12분교는 12부경과 같은 말로 계경, 응송, 기별, 풍송, 자설, 인연, 비유, 본사, 본생, 방광, 희법, 논의 12분류를 말한다.

수다라(修多羅)의 정확한 번역은 계경(契經)이다. 합할 계(契)자를 쓰는데 계리계기(契理契機)라 하여 이치에 계합하는 것이고 중생의 근기에 계합하는 것이다.이치에도 맞고 중생을 구제하는 근기에도 맞는 학설이고 가르침이 수다라다.

불교 경전에는 진리에 안맞는 방편설이 많다. 그러나 궁극으로는 이치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중생들을 구제하는 방편이 뛰어나도 진리에 안 맞으면 곤란하다. 또 아무리 우수한 진리라 하더라도 중생의 근기에 안 맞으면 쓸모가 없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 화엄경은 경문이고 원문이다. 청량스님은 그 원문을 가지고 소(疏)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석을 했는데 이것이 너무 간략하므로 다시 해석을 붙인 것이 초(抄)다. 청량스님의 소초(疏抄)를 가지고 지금 나처럼 나름대로 해석을 붙이게 되면 그 또한 소(疏)가 되고 초(抄)가 되고 논(論)이 된다. 그러한 것이 끝없이 펼쳐나간다. 이렇게 불교는 가면 갈수록 불어나고 그 가르침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첨가된다. 누가 경전을 해석하거나 논문을 써도 전부 불교의 전적으로 포함한다. 경, 율, 논 삼장의 역사가 그랬고, 선장의 역사가 그랬다. 그러므로 수다라는 무진(無盡)이다.

기독교는 이와 반대다. 기독교 역시 초기에는 경전이 많았지만 기준을 정해서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 깎아내고, 깎아낸 것은 배제하였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지금의 신구약 성경이다.

청량스님은 화엄경이야말로 모든 불교전적의 총명이라고 하였다. 무궁무진한 경전이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제목 속에 다 들어간다. 불교경전은 책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만 하더라도 소위 팔만대장경이고 글로 이루어지지 않은 많고 많은 경전이 또 있다.그런데 밀교 경전, 현교 경전, 선불교 저술, 그 어떤 불교의 가르침이 무궁무진 많아도 단 하나의 경전으로 이름할 수가 있다. 그 이름이 바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그것이 총명이다.

스님들은 길을 가다가 소를 보거나 개를 보거나 하면  ‘축생보(畜生報)를 벗어나서 사람 몸을 받아라’하는 뜻에서 ‘대방광불화엄경’ 하고 한 번 들려준다.

우리 불자들은 그것을 할 줄 알아야 된다.

남의 집에 가서 강아지를 보더라도 ‘대방광불화엄경’ 하고 합장하고 불러주면 강아지는 못 알아들어도 내 마음이 전해진다.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만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에 그 힘으로 축생보를 벗어난다.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에서는 ‘묘법연화경’ 경제목 외우기를 권장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나 능엄경, 원각경 등 얼마나 많고 많은 경이 있는가.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한 마디로 경 이름을 한다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무진수다라의 전체적인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을 한 번 부르면 팔만대장경의 그 많고 많은 이름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없다.

천태지자스님 같은 이들은 화엄경 공부도 많이 했지만 법화경을 우선으로 한  스님이다. 그런 분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좀 섭섭할 것이다.

그런데 화엄경을 모든 수다라의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9門에서도 보았듯이 ‘화엄경을 만나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라고 한 청량스님의 안목이다.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각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원각경이 제일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고, 능엄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경전의 총명은 능엄경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량스님의 안목으로는 ‘화엄경이야말로 전체 경전의 대표 이름이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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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묘엄품제1자(世主妙嚴品第一者)는 :세주묘엄품 제1이라고 하는 것은

즉중편의류지별목(卽衆篇義類之別目)이로다: 여러 편으로 의미를 나눈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약찬게에도 나와 있듯이 화엄경은 39품으로 나눈다.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39품으로 나누어서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화장세계품, 세계성취품 등등 화엄경 39품에 낱낱이 다른 제목을 붙이게 되는데 세주묘엄품은 그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2,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석하다[雙釋二目]

大以曠兼無際요 方以正法自持요 廣則稱體而周요 佛謂覺斯玄妙요 華喻功德萬行이요 嚴謂飾法成人이요 經乃注無竭之涌泉이로다

대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은 정법을 스스로 가짐이요, 광은 체에 합하여 두루함이요, 불은 현묘함을 깨달음이요, 화는 공덕만행을 비유함이요, 엄은 법을 꾸며 사람 이룸을 말함이요, 경은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댐이다.

 

貫玄凝之妙義하고 攝無邊之海會하며 作終古之常規하니 佛及諸王을 並稱世主요 法門依正을 俱曰妙嚴이라 分義類以彰品名하야 冠群篇而稱第一이라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가없이 드넓은 회중들을 포섭하며, 아주 먼 옛날의 항상한 법규를 지으니, 부처님과 여러 제왕을 아울러 세상의 주인이라 일컫고, 법문과 의보와 정보를 함께 미묘한 장엄이라 한다. 뜻의 종류를 나누어 품의 이름을 드러내어 여러 편의 첫머리에 두어 제일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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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석이목(雙釋二目) :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 이 두 가지 제목을 쌍으로 해석한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할 때의 경의 제목과 품의 제목을 해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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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이광겸무제(大以曠兼無際)요 : ‘대방광불화엄경’의 ‘대’는 허공처럼 끝없이 크고 멀고 텅 비었고 밝다. 대(大)는 무한히 큰 것이다. 화엄경은 널리 두루두루 전체를 다 겸했는데 제한이 없고 끝이 없고 한계가 없이 겸했다. 한계 없이 넓고 넓은 것이 대방광불화엄경의 대다.

우리 사람이 그렇고, 사람마음, 진리, 진여, 불성, 부처님, 법성은 이름이 달라서 그렇지 전부 한가지 뜻이다. 그것이 텅 비고 넓고 크고 끝이 없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끝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 경허스님은 ‘大라! 대들보도 大요, 댓돌도 大요, 대가사도 大요, 세숫대야도 大요, 담뱃대도 大니라!’라고 하였다. 처음 내가 경허스님이 화엄경 제목을 해석한 것을 만나고는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허스님 아니고는 이런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청량스님도 이렇게는 해석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놀랐고,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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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정법자지(方以正法自持)요 : 방(方)은 바른 법으로써 정법을 스스로 가진 것, 정법을 다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아주 모범일 때 방정(方正)하다고 한다. 방은 ‘아주 정확하다. 절도 있다.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신을 정리한다든지 방석을 정리하는 것도 절도 있게 정리를 잘 해 놓는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 할 때의 방자 안에 세상의 진리, 참되고 바른 이치를 다 담았다. 정법으로써 스스로 지키는 것이 방(方)이다.

경허스님은 ‘方이라! 큰방도 方이요, 지대방도 方이요, 질방도 方이요, 동서남북 사방도 方이니라.’라고 하면서 대방광불화엄경의 방만 방이 아니라 방자가 붙은 것은 다 방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의 깊고 넓은 뜻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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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즉칭체이주(廣卽稱體而周)요 : 광(廣)은 진리의 본체에 칭합해서 두루한 것이다. 진리의 본체라고 하는 것은 있지 아니한 곳이 없기 때문에 두루하다. 모든 곳에 다 펼쳐져 있다.

우리가 지금 한 생각 내면 순식간에 미국에도 가고 순식간에 일본에도 가고 중국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달나라에도 가고 별나라에도 간다. 아무리 몇백억 광년이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먼거리에 있는 별나라도 마음의 속도로는 순식간에 간다. 일찰나에 간다. 못가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무슨 별이 있는 지 몰라서 못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천문학자가 ‘이 별은 빛의 속도로 가도 100억 광년이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별인데 발견했다’ 고 신문에서도 자주 보는데, 그것이 무슨 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우리 마음은 순식간에 그 별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그 체(體)는 두루해서 어디든지 안 가는 곳이 없다.그래서 광(廣)이라 한다. 대(大)나 방(方)이나 광(廣)이나 전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고 진여(眞如)를 설명하는 것이고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설명하는 것이고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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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위각사현묘(佛謂覺斯玄妙)요 : 불(佛)은 아주 깊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이 현묘한 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띄워 읽는데 이것은 4.3조로 읽는 한국 사람들의 언어습관에 의한 것이다. 정확하게 읽으려면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읽어야 한다. 이 원칙을 지켜서 꼭 ‘대방광/ 불화엄경’이라고 읽는 스님이 있다. 불자들은 이러한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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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공덕만행(華喩功德萬行)이요 : 불교에서 꽃[華]이라고 하면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공덕만행을 비유한 것이다. 아름다운 몸짓, 아름다운 말씨, 아름다운 마음씨,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을 통해서 꽃처럼 아름다운 행위를 할 때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공덕이 되는 일이다. 꽃 한 송이를 갖다 꽂아도 공덕이 되고 차 한 잔을 갖다 바쳐도 공덕이 되고 노래 한 번 불러도 공덕이 되고 목탁 한 번 치고 죽비 한 번 치고,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바삐 쫓아오는 차가 있으면 살짝 비켜주는 그런 행위도 공덕이 된다.이것이 공덕만행이고 세상의 꽃이다.

법상에 꽃 한 송이를 갖다 놓으니 분위기가 달라진다. ‘화장실에 꽃을 한 송이 꽂을 줄 알아라’ 하고 나는 자주 말한다. 화장실에 꽃 한 송이를 꽂아놓으면 화장실 분위기가 싹 달라진다. 작은 공덕이 됐든, 큰 공덕이 됐든 세상에 보탬이 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말씨와 마음씨와 솜씨 행위는 세상의 꽃이 된다. 그 셋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하는데 그 셋을 우리가 공덕이 되는 행위로써 하면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살만해진다. 그러한 행위로써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준다. 옆 사람이 좋아하고 이웃 나라가 좋아한다. 척박한 땅에 산다 하더라도 그러한 꽃이 피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것이 공덕만행이다. 공덕은 그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남이 잘 되도록 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조건 남을 배려하는 것, 남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에 세상 물질로 비유하자면 꽃이다. 꽃으로 장엄 해놓은 것과 같다. 화엄경의 화(華)는 꽃을 심어서 세상을 장엄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공덕되는 공덕의 만행을 행했을 때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는 꽃이 된다는 뜻이다.

대중들이 모였을 때 그 친구들하고 모처럼 만났을 때도 덕담 한 마디 잘 하면은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런 것이 세상의 꽃이다.좋은 장엄이 된다.

그렇지 않고 자기 복을 까먹고 싶은 사람은 모처럼 만나서는 ‘너는 왜 이렇게 늙었노’이런 소리나 한다. 나는 모처럼 만난 도반이 그런 소리하면 ‘도대체 인사하는 법도 못 배웠냐’고 사정없이 면박을 줘 버린다. 안 그래도 병들고 늙고 엉망진창이 되어서 속상하고 죽을 지경인데 거기다가 ‘아이고 얼굴이 왜 그러냐’고 하는 것은 인사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절대 그런 인사를 하지 말길 바란다. 아무리 늙고 병들어서 곧 죽을 모습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전보다 좋아 보인다’‘생기가 나 보인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약이 되고 장엄이 되는 것이다. 공덕만행이 다른 것이 없다. 그게 꽃이다. 화장실에 꽂은 한 송이 꽃의 역할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화엄경 공부하는 분들은 이런 소리를 몇 번씩 들어서 다 그런 인사는 안할 것이다. 한 번씩 마음씨 좋은 도반이 와서 인사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 그러나 절대 그런 인사는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괜히 입에 발린 소리로 ‘좋아보인다. 좋아보인다’그렇게 여러 번 할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속 보이는 일이다.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다’‘건강해 보인다’라고 점잖은 표현으로 얼마든지 병든 사람에게도 충분히 덕이 되는 말을 할 수가 있다.그런 것이 공덕만행(功德萬行)이다. 세상의 꽃이다. 사람은 어디 가서든 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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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위식법성인(嚴謂飾法成人)이요 : 엄(嚴)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장식하여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식(飾)이라고 하는 말도 엄(嚴)이나 다를 바 없다. 꾸미고 장식한다는 뜻이다.

법의 장식, 세상의 이치를 장식해서 꾸민다. 그래서 사람을 성취시키고 성숙시킨다. 사람이 사람되게 한다. 말하자면 공덕만행으로써 세상을 장엄할 때 사람을 성숙시킨다.

수많은 성인이 나와서 그렇게 가르쳤건만 지금도 이 세상은 삭막하고 험하기 이를 데 없다. 뉴스에는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잘못하는 일들만 쏟아져 나온다. 만일 이 세상에 성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지 모른다.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어 간다고 하는 식법성인(飾法成人)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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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주무갈지용천(經乃注無竭之涌泉)이로다 :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다 함이 없이 솟아오르는 끝이 없는 샘물을 계속 대주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결사’를 했는데 만일에 끝날지 안끝날지 알 수가 없다. 계속 부어주는 것이다. 화엄경이 얼마나 훌륭한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이야기해도 늘 새롭다. 화엄경 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인데, 경(經)의 뜻은 마르지 않는 솟아오르는 샘물, 법의 샘물을 우리에게 대어주는 것이고 부어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강원에서 경학을 공부하는데 경이라고 하는 글자 속에는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과 선불교 전적을 포함하여 불교의 모든 전적들이 다 포함된다. 그래서 경을 한마디로 불교의 고전이라고 한다.

우리가 불교 안에서 산다면 그 기본사고의 틀도 경에서 나와야 된다. 선배 스님들로부터 구두로써 불교를 배웠다고 해도 그 근본은 경이다. 건물을 하나 세워도 그렇다. 속인들이 지어놓은 절들은 스님들이 지어 놓은 절과 다르다. 스님들의 근본 사고가 이미 경이라고 하는 과거의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훈습이 된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일선에서 포교를 하든지 법문을 하든지 간단하게 일대일로 신도들을 만나든지, 관광객에게 전각 하나를 설명하든지 그 근거는 결국 경에서 나온다. 경이 기본이 되고 근거가 되어 이렇게 저렇게 활용되는 것이다. 설법이나 강의, 연구, 미술, 조각 등등 불교 안에서 무엇을 하든 그 근거와 기본이 바로 불교의 고전인 경이다. 그래서 이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교수를 하든 포교를 하든 설법을 하든 주지를 살든 항상 밑천이 딸린다. 마치 한 1년치 세금을 못낸 장사꾼 같은 심정이 된다.

여기에도 보면 경은 무갈지용천이라고 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다함이 없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샘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중요시 여기고 평생 늘 공부해야 한다.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경이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어서 써도 써도 다함이 없다. 불자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근거가 모두 경을 통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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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응지묘의(貫玄凝之妙義)하고 : 아주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꿰뚫고.

관(貫)은 꿰뚫는다, 아주 깊고 오묘한 뜻을 관통하고 있다는 뜻이다. 화엄경이 너무 깊고 깊은 의미라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 이해를 못하다 보니 설명 역시 다 못한다. 그래서 이 화엄경 강의에서도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화엄경 자체는 미묘한 뜻을 다 꿰뚫고 있다.

섭무변지해회(攝無邊之海會)하며 : 끝없는 대중의 모임을 다 포섭하고 있다.

가없는 법회, 바다와 같은 법회를 다 포섭하고 있는 것이 또한 화엄경이다.

회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모임이고 법회다. 세주묘엄품에서 보았듯이 화엄경은 의미도 깊지만 그 등장하는 인물들, 세간 주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야말로 무변이다.

작종고지상규(作終古之常規)하니: 아주 먼 옛부터 내려오는 떳떳한 규칙이며 항상하는 법규다. 최후까지 그 떳떳한 법규가 된다. 이 화엄경은 영원까지 우리가 의지해야 할 영원무궁 변함없는 법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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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급제왕(佛及諸王)을 : 그동안 세주묘엄품에 등장했던 부처님과 신장과 왕은 얼마나 많은가.

병칭세주(並稱世主)요: 이런 이들을 모두 합해서 세상주인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모든 왕들을 이름해서 세상 주인이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주인이다.

집에 가면 남편만 주인이 아니라 부인도 주인이고 아들도 주인이고 딸도 주인이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다 주인이다. 꽃도 주인이고 꽃잎도 주인이고 꽃 줄기도 주인이고 뿌리도 주인이다. 그 입장에서 보면 전부가 주인이다.

세주묘엄품에도 나오지만 허공은 허공대로 주인이고 바람은 바람대로 주인이고 물은 물대로 주인이다. 바다는 바다대로 주인이고 불은 불대로 주인이다. 그래서 주해신, 주화신, 주풍신, 주공신 전부 개별적으로 완전무결한 존재다.

법문의정(法門依正)을 : 법문과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의(依)는 의지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이 의지하는 환경과 국토다. 정(正)은 부처님 자신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의(依)가 되고 우리 자신은 정(正)이 된다. 부처님의 그러한 만행만덕(萬行萬德)을 표현하는 것이 세주묘엄품의 내용이다.

화엄경 세주묘엄품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의지하고 있는 세계가

구왈묘엄(俱曰妙嚴)이라: 다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 오히려 너무 많고 너무 아름답게 갖추어져 있지 않는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함께 말하기를 아름답게 장엄한 것이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인 의보(依報 환경세계)와 우리들 자신인 정보(正報 우리들의 심신)와 부처님,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법문 이런 모든 것이 이 화엄경에는 다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다 무르녹아 있으니 함께 아름답게 장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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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류이창품명(分義類以彰品名)하야 : 뜻의 종류를 나누어서 품의 이름을 드러냈다.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등등 여러 품의 제목들이 그런 것을 뜻하고 있다.

관군편이칭제일(冠群篇而稱第一)이라 :그 여러 품들 중에서 제일 위에 두었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여러 가지 편 위에 세주묘엄품을 제1로 칭했다.

 

 

3,경과 품의 제목을 결론짓다[雙結二目]

斯經이 有三十九品하니 此品이 建初라 故云 大方廣佛華嚴經 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이 경이 39품이 있으니 이 품이 처음에 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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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결이목(雙結二目) : 경과 품의 제목을 결론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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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斯經)이 : 이 경이

유삼십구품(有三十九品)하니: 39품이 있으니

차품(此品)이: 이 품인 세주묘엄품이

건초(建初)라: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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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故云) :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

세주묘엄품제일(世主妙嚴品第一)이라하니라 :세주묘엄품 제1이라고 되어 있다. 왕복서라고 하는 이 화엄경의 서문이 끝나고 바로 들어가는 구절이 ‘대방광불 화엄경 세주묘엄품 제1’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한문방식으로 쓴 것이고 요즘으로 치면 ‘대방광불화엄경 제1 세주묘엄품’ 이라고 해야 맞고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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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다 보니 왕복서 서문 속에 깊은 뜻이 많이 담겨져 있다. 내가 혼자서 왕복서를 읽을 때는 참 깊고 오묘한 맛을 느끼는데 설명하려니 해놓고도 ‘영 이게 아닌데’하고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공부를 한다고 했어도 이 깊은 뜻의 10분의 1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고, 또 10분의 1도 아직도 설명을 덜했다.

왕복서는 화엄경 내용을 압축한 서문임과 동시에 불교의 글로써 최고의 명문이다. 불가사의하고 무궁무진한 뜻을 다 드러내서 여러분에게 전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여러분 스스로가 왕복서를 반복해서 읽고 쓰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간혹 무릎을 치면서 ‘아하 이런 뜻이구나’ 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오묘한 뜻을 느낄 때 그 어떤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왕복서를 그야말로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펴보았다.

왕복서를 책상 앞에 세워두고 늘 읽기 바란다. 사경도 권한다. 천번 쯤 읽고 백번쯤 써서 왕복서를 외우고 여러분 각자가 그 깊은 의미를 체득하기 바란다.나에게도 이 서문은 아주 큰 숙제다. ‘이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아름답게 번역하고 세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감동적인 말씀을 붙이는 것이 언젠가 해야 할 일인데’하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화엄(華嚴) 꽃으로 장엄하다는 뜻이다우리들 삶의 꽃은 아름다운 행위보살행이다보살행으로 인간 세상의 모든 삶을 아름답게 꾸며갈 화엄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